도착한 당일 밤, 러네이 플레밍(1959~)의 리사이틀을 듣기 위해 카네기 홀로 향했다. 실제로 이 공연 티켓을 일찌감치 예약하고 거기에 맞춰 항공권을 구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러네이의 리사이틀을 들었지만, 가장 좋았다고 기억되는 공연은 2005년 루체른 페스티벌이었다. 아직 살아 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가 지휘하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공연이었다. 러네이가 등장하자 무대 위로 꽃이 큰 원을 그리며 활짝 피어나서 홀 전체가 화려한 색깔로 물드는 듯했다. 모든 사물의 윤곽이 극도로 부드럽고 깊이 있는 노랫소리와 함께 녹아들어갔다. 지상에 이런 목소리가 있다니……. 기적을 만난 것 같았다. 그 밖에도 러네이 플레밍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이브뷰잉(영화)에서 본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타치아나, 「장미의 기사」의 원수 부인, 「카프리치오」에서 시인과 음악가로부터 동시에 사랑을 받은 백작 부인, 「타이스」의 타이틀 롤 등등……. 맡았던 배역마다 뛰어난 목소리를 들려줬다. 바로 그녀가 지금 자신의 음악 인생의 절정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이것만으로도 직접 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네이 플레밍은 체코계 이민자의 자손이다. 음악 교사였던 부부의 딸로 펜실베이니아주 인디애나에서 태어나,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자랐다. 영어 외에도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체코어, 러시아어 등으로 노래를 부른다. 플레밍의 노래는 발음이 명료하여,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알려져 있다.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아파트의 방 하나를 숙소로 잡았다. 거기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지하철과 도보를 이용해 카네기 홀로 향했다. 하지만 긴 여행 탓에 시간과 거리 감각이 헝클어진 듯 공연 시작은 오후 8시였는데 6시 조금 지나 도착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높은 마천루로 둘러싸인 거리를 무작정 걸어, 교차점을 중심에 두고 카네기 홀의 대각선에 자리 잡은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가게는 아직 텅 비어 있었고 키가 큰 웨이터들이 여유롭게 서 있었다. 넓은 창문과 맞닿은 자리에 F와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해 저물 무렵의 맨해튼, 확 트인 도로 건너편에 카네기 홀 빌딩이 보였다. 높은 빌딩 골짜기 틈 속으로 하늘은 아주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빛깔이 느릿느릿 저녁에서 밤으로 변해갔다. 하나둘씩 네온이 켜지기 시작하고 다양한 차림새의 남녀들이 엇갈리며 지나간다. 이런 모습을 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무성영화의 슬로모션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데자뷔…….
그때, 강한 기시감이 덮쳐왔다. 동시에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작품 「나이트호크스」가 뇌리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지금 내 모습은 그 그림 속 남자와 같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미 모자를 잃어버린 나는 맨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