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배우 엘리엇 페이지의 『페이지보이』, 재미있게 읽고 계신가요? 모든 책을 늘 최선을 다해 만들지만, 『페이지보이』는 유난히 더 공을 들인 책입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는 책인 만큼,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이야기가 닿게, 잘 들리게끔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 다른 책들의 타래를 엮는 대신, 이 책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보려 합니다. 『페이지보이』를 깊이 읽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편집자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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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부분은 끝까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인칭대명사의 사용이었어요. 한국어는 영어나 여러 유럽언어와 비교했을 때, 적어도 인칭대명사의 사용만큼은 성별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일 거예요. 사람을 가리키는 주어가 종종 생략되어도 뜻이 통하고, 극단적으로는 대명사를 아예 사용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고 효율적인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라는 인칭대명사는(사실 ‘그’ 역시) 한국어에서 필수가 아니죠. 오히려 외국어 문헌이 많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이 들어온 단어입니다. 성불평등하다는 점, 원래 한국어에는 없는 표현이라는 점 등등 여러 이유에서 의식적으로 사용을 지양하는 출판사(그리고 편집자, 번역가)들도 있습니다.
한편 (엘리엇 페이지의 모어인) 영어는 사정이 다릅니다. 대단히 명확하게 여성과 남성을 구분 지어 서로 다른 인칭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인 언어이니까요. 따라서 영어를 사용하는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당사자들에게는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트랜스 커밍아웃 이후 자신을 (스스로가 정체화한 성별에 따라) ‘she’나 ‘he’라고 지칭하기를 요청하는 이들도 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인칭대명사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they’를 단수 인칭대명사로 사용하는 사례죠.
저와 송섬별 번역가 역시 처음에는 한국어의 장점(?)을 살려, 인칭대명사에서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작업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기존의 관습적인 성별이분법 체계를 보여주는 쪽이 이 책에는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옮긴이의 말’을 인용할게요.
“우리말에는 ‘그’라는 성별 불특정적 대명사가 이미 존재한다. 번역자이면서, 책을 옮기는 일이 한편으로는 언어를 더 나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일이고, 때로는 고집을 부릴 필요도 있다고 믿는 나는 여태 인물의 성별을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 맥락이 아니라면 ‘그녀’라는 단어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자 해 왔다. 그러나 젠더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가로지르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옮기기 위해서는 결국 이미 존재하는 문제적인 범주들을 끌어와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396~397쪽)
또 하나는 혐오표현의 번역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한국어로 옮길 수 있는 표현은 최대한 번역을 하는 것이 ‘한국어로 된 책’에 맞는다는 생각 때문에, 한국어에서 유사한 용례로 쓰이는 표현으로라도 번역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송섬별 번역가는 한국어로 옮기는 대신 주석을 달아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새로운 금기어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고, 이미 그런 말이 있다면 덜 쓰이다 잊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397쪽)라는 이유에서였는데, 번역서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미처 생각지 못한 윤리적 고려를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기계적으로 ‘원칙’을 들이대며 일하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반성도 했고요.
💌 다음 편에서 디자인 비하인드가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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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페이지는 스스로 노래를 만들 만큼 음악을 사랑하고 또 많이 듣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엘리엇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해준 노래들이 여러 곡 언급돼요. 그중 특별히 더 의미를 갖는 노래들을 엮어 ‘플레이리스트 책갈피’를 굿즈로 만들기도 했는데요. 분량상 담지 못한, 이 곡들이 언급하는 맥락을 함께 읽으며 음악을 들어보기를 제안합니다.
플레이리스트 듣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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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다. 해 볼 것
2. 사람들은 술에 만취한다. 해 볼 것
3. 사람들은 음식 먹기를 그만둔다. 해 볼 것
4. 사람들은 스스로를 억누른다. 해 볼 것
방 안에 작은 칼을 두고 칼끝을 위팔, 어깨 가까운 곳에 댔다. 칼을 누르면서 빨간색이 보일 정도로만, 안도감이 찾아올 정도로만 살짝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토론토의 집에 혼자 있던 어느 밤, 내 머리가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비밀을 속삭였고 나는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 부엌에 놓인 파란 크롬 소재의 조그만 식탁에 앉아 주스 잔에 보드카를 따라 마셨다. 마신 뒤에는 또다시 병을 기울여 술을 따랐다. 불쌍한 빕케가 집에 왔을 때 발견한 건 우울한 십 대 청소년이 브로큰 소셜 신의 「열일곱 살 소녀를 위한 송가」를 반복재생해 둔 채 고주망태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불행해 보았기에 네가 좋았어
이제 넌 짙은 화장을 하고 떠나 돌아오지 않아
돌아올 수 없니?”(87~8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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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학년 때, 학교가 끝나면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 스포츠브라와 브리프만 입은 차림으로 블라인드를 내리고 거실에 있던 어머니의 오디오로 「더 우즈」 CD를 들었다. 극장 바닥을 뚫고 나온 숲, 나무로 된 무대를 둘러싼 채 거의 활짝 열려 있는 묵직한 붉은 커튼이 나와 있는 앨범 재킷도 마음에 들었다. 재생 버튼을 누른 뒤 볼륨을 높이, 더 높이, 더 높이 올렸다. 듣는 사람을 밀물처럼 실어가는 재닛 바이스의 드럼이 등장하는 순간이면 내 몸이 아래로 떨어지고, 차오르고, 흔들리면서 다른 세계로 들어섰다.
(……) 코린 터커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거칠고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헤드뱅잉을 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엉망진창으로 춤을 추게 됐다. 그렇게 CD 한 장이 다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온 힘을 다해 팔다리를 쭉쭉 뻗고, 늘리고, 미친 사람처럼 에너지를 분출하며 집을 돌아다녔다. 땀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스무 번 하고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가 달려 내려온 뒤 또다시 팔굽혀펴기를 했다.”(184~18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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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은 슬리터 키니의 곡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으로, 캐리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면 의욕이 생기고 어딘가 다른 세계로 갈 것만 같았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이봐! 주위를 돌아봐, 그들은 네게 거짓말하고 있어!
그들은 거짓말하고 있어, 하, 거짓말하고 있다고!
그저 바보 같은 계략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겠어?
그들은 거짓말을 해, 나 역시 거짓말을 하지!
네가 원하는 것은 그저 즐거움일 뿐,
나를 찢어버려, 정말 자유롭거든, 예
학교에서 돌아온 뒤 거의 매일 이렇게 춤을 추곤 했다. 나는 슬리터 키니의 「더 우즈」와 피치스의 CD를 번갈아 듣곤 했는데, 내가 가장 즐겨 들었던 음악들이다. 귀여운 어린 퀴어 시절이었다. 이 음악으로 보호받고 있을 때면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 몸 밖으로 밀어내어 연결성을 번쩍 깨우고자 시도했다.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아쉽지만, 내가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동안 음악이 나를 꼭 안아 주는 것은 영적인 경험이었다.”(185~1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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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끝날 무렵 우리는 잠시 레코드숍에 들러 집으로 가는 길에 들을 CD를 샀다. 그곳에는 새로 발매된 CD들을 들어볼 수 있는 청음 스테이션이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큼지막하고 힙한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에밀리아나 토리니의 「미 앤드 아르미니」 앨범에 수록된 「파이어헤즈」를 들었다.
갈 길이 멀어
너는 더는 전화기 옆에 앉아 있지 않지
전화기를 집어 들어 바위에 던져 부숴버릴 거야
그렇게 네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래의 도입부는 이렇다.
우리는 흰색 포드에 타고 다시 남쪽 유진을 향했다. 이 앨범 속 에밀리아나 토리니의 목소리, 몽롱하면서도 희망찬, 깊이와 감정이 뒤섞여 가슴이 미어지는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사운드에 우리는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할 미래의 여행,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배경음악이 되었다. 포틀랜드로의 주말여행은 우리 공통의 호기심을 따르는 방법, 한 팀이자 창조적 파트너가 되는 방법을 이해하고 실험하는 일이었다. 우리 둘 모두, 우리가 영영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체현의 감각을 갈망했던 것 같다. 비록 우리 각자의 수치심의 폭풍 속에 갇혀 있다 해도 함께 있으면 많은 것들이 가능하게 느껴졌다.”(188~18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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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는 나보다 더 많은 역경과 장벽을 경험한 사람이었음에도 나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나를 지지하고 진정한 내 모습을 봐 주었다. 그녀의 이름과 같은 제목을 가진 앨범 「스타」를 처음 들었을 때 스타의 목소리에 매혹된 것을 기억한다. 그 뒤로 몇 주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노래 「하트브레이커」의 가사가 울려 퍼졌다.
너무 행복해지는 게 두려워
네가 알면 떠나 버릴까 봐 겁이 나
너무 행복해지는 게 두려워
네가 알면 떠나 버릴까 봐 겁이 나
물이 첨벙이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배경에서 한데 뒤섞이는 가운데 우리는 큼지막한 의자 하나에 함께 앉았다. 우리는 젠더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내 불편함이 얼마나 큰지, 심지어 배역을 연기하고 있을 때조차도 더는 여성스러운 옷을 입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옷을 겹겹이 껴입을 수 없는 여름이면 티셔츠 아래로 두드러지는 가슴 때문에 목을 구부정하게 내밀고 시선을 내리깔 수밖에 없단 이야기도 했다. 셔츠를 끌어당겨 몸을 감쌌고 자세도 구부정해졌다. 인도를 걷고 있다가 가게 유리에 비치는 내 옆모습을 보면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도 볼 수 없었다, 사진 속에 있는 건 내가 아니었으니까. 모든 게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젠더 디스포리아가 나를 서서히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286~28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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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스모크 머신의 연기, 음경과 가슴…… 엄청난 쇼였지만 공연이 절반쯤 흘러갔을 때 피치스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앞으로 살짝 몸을 숙이더니 균형을 잃은 듯 살짝 비틀거렸다. 관중 사이에 걱정이 퍼졌다. 피치스가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마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음악이 멈췄다. 피치스는 무대 끝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니, 관객들을 향해 피를 흩뿌렸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고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내 온몸이 가짜 피로 흥건히 젖었다. 양손을 높이 쳐들고 있는데 피치스가 내 팔꿈치를 붙잡고 그대로 손목까지 손을 미끄러뜨려 내 팔을 온통 새빨간 피로 물들였다.
피치스는 대부분의 사람들, 적어도 내가 살면서 만난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극도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렇게 날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이 경이로웠다. 피치스는 거침없이 섹슈얼하고 대담하고 공격적이었으나, 그녀의 음악에는 아름다운 취약함의 순간들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처럼 당당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나를 붙드는 두려움을 버리고 싶었다.”(39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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