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주는 인상과 실제 내용이 좋은 의미에서 영 딴판인 책이에요. 다소 평범할 듯한 첫인상에도 이 책을 펼친 이유는, 저자 다이애나 애실이 75세(!)에 은퇴할 때까지 50년간 필립 로스, 잭 케루악, 시몬 드 보부아르, 마거릿 애트우드 등 세계적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책을 만든 전설적인 편집자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력을 가진 작가가, ‘죽음이라는 진실을 외면하고자 인간이 노년기를 늘리려 애써온 데 비해, 정작 노년을 다룬 책은 별로 없으니 내가 한번 써보겠다.’라면서 91살에 쓴, 노년에 대한 글을 어찌 마다하겠나요. 현자의 목소리가 들려올까 했던 이 책은 놀랍도록 솔직하고 현실적이고 유머러스해요.(위트 넘치고 종종 신랄한 에프런의 유머가 미국적이라면, 어딘가 좀 더 고약해 뵈는 애실은 역시 영국인이랄까요.) 노년기의 연애와 성, 관습에서 벗어난 관계들, 죽음의 경험들, 정신과 육체의 변화, 정원과 그림이라는 취미 등 노년의 삶을 이루는 주제들을 다루는 데 에두름이나 불평, 후회, 억울함 따윈 없습니다. 통념과 도덕을 거스르는 자신의 선택, 노화와 죽음을 마주하는 일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써내리고, 당대의 사회문화적 한계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애실이 1917년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놀랍게 느껴지고요.) 에프런과 애실, 일찍이 자기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경력을 개척해온 두 여성이 들려주는 회고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내가 느끼기에 병원의 진짜 문제점 하나는, 그곳이 간호를 더 잘하기 때문에 죽으려는 순간 다시 삶 쪽으로 끌려올 가능성이 많아 ‘시설’에 있을 때보다 더 오랫동안 비참함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는 그렇게 가까스로 회생하면 매번 기뻐했다. 그때가 되면 다 그럴까? 나도 그럴지 어떨지 알 때가 되면 알려주고 가겠다.”―102쪽 저자 장 아메리가 이 책의 속편 격이라 일컬은 『자유죽음』을 소개한 바 있는데요. 이 책은 늙어감과 죽음에 관한 도저하고 치열한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손쉬운 위로나 희망, 지혜, 체념은 없습니다. 곧 추상성이 높지만, 이론적이거나 완벽한 논리를 구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찰’이라는 방법에 “주의 깊은 관찰과 공감 능력”을 더해, ‘살아본 구체적인 경험’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 책의 물음은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시간을, 자신의 몸을, 사회를, 문명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메리는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 안에 쌓인 시간을 인생으로 기억”하고, 따라서 “노인은 전적으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자이자, 시간의 소유자이며, 시간을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요. 또한 고통을 호소하는 ‘몸’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데, 아픔으로 경험되는 늙어감은 한 인간을 자아(“오로지 나의 자아”)의 발견(또는 성장)에 이르게 하지만 세계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어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측정되는 ‘사회적 연령’을, 문화적 노화를, 불평등하고 불가사의한 죽음을 이야기하죠. 읽어나갈수록, 늙어감과 죽어감이라는 두려움, 모순, 공허, 부조리를 끝까지 직시하려는 나이 든 화자의 곁으로 가게 됩니다. “아픔과 질병은 몸이 쇠락하며 벌이는 축제다. 몸은 자신과 나에게 이 축제를 베풂으로써 나라는 자아는 이 축제에서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자아의 성장에 불을 붙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나라는 자아가 행사하는 몸의 기능은 떨어지지만, 동시에 나의 직접성, 곧 내 자아의 자각은 늘어난다. […]
자아 발견과 자기 소외의 묵묵한 대화에서, 늙어가는 사람이 비참함과 불행함으로 경험하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전면에 서는 것은 자기 소외다. 아픔으로 물든 몸의 실체화로 빚어지는 자아 성장은, 그게 비록 언제나 특정한 증상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기는 할지라도, 그 자체는 극히 드문 순간에만 체험되기 때문이다.”―82~83쪽 이 책은 “돌봄과 간병의 직접적인 체험기이자 돌봄”의 중요성을 말하는 저자 자신의 “증언”입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의료인류학자인 아서 클라인먼은 조발성 치매에 걸린 아내를 10여 년간 간병한 경험을 바탕으로, 돌봄의 개인적·사회적 의미, 보건의료에서 돌봄의 가치를 다룹니다. 노화와 질병은 피할 수 없고,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 돌보거나 스스로가 돌봄 받을 일이 늘어나지요. 가족 간병 또한 점차 나와 무관한 주제가 아니기에 돌봄의 무게나 양상이 사뭇 달라집니다. 돌봄은 우리를 더 강하고 관계를 잘 맺는 “사회적 존재가 되게 하고” “집단적 존재감”을 강화해준다고 이 책은 말합니다. 돌봄이 “보람 있고 풍요로운 인간의 경험이 되는” 것은 그것이 “상호적”이기 때문이고요. 돌봄받는 이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 말이 항상 긍정적인 의미는 아닌데, 이로 인해 돌봄 하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클라인먼이 아내의 배변 처리 일화를 언급하면서 “가장 지독한 조건의 돌봄에서도 돌봄은 상호적”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매우 인상 깊었어요. 클라인먼은 이런 내밀한 고백을 기록하는 한편, “돌봄과 돌봄의 환경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주는 의료 시스템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또 삶의 맥락, 사회문화적 맥락과 유리되고 첨단기술화만 추구하는 의료, 돌봄을 경시하고 윤리가 부재한 의료를 세심하고 강력하게 비판하죠. 다시 말해, 이 책에는 아내의 오랜 돌봄과 사랑을 돌려주려 애쓰는 남편, 진료실에서 매번 전전긍긍하는 환자의 가족, 현대의학의 한계를 진단하는 사회의학 연구자, 질병 서사를 중시하는 의료인문학자 등등의 목소리가 아울러져 있어요. 돌봄이 불행한 의무가 아닌 인간다움을 위한 도덕적 실천임을 설파하는, 무척이나 감동적인 기록입니다. “돌봄의 핵심은 옆에 있음, 현존이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모두 생생하고 온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서로의 곁에 존재하는 일이다. […] 돌봄은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추억을 살피는 일로 이어진다. 나는 돌봄이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들을 목격하게 하고 자기 의심과 무력감을 수없이 마주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을 나누게 하고 서로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삶의 목적의식과 감사를 키운다는 사실을 배웠다.”―15쪽 |
책과 책을 잇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