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한파로 또다시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체감하고 있는 연말이지요. 한 해를 정리하고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대를 품으면서도 ‘미래’, ‘희망’이라는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은 ‘위기’의 시대예요. 이런 단어들이 너무 거창하거나 의미가 너덜너덜해졌다고 느끼지만, 미래나 희망을 생각하지 않을 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한없이 왜소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는요.
『오웰의 장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을 장미를 심고 가꾸기를 사랑했던 작가, 기쁨과 아름다움의 작가로 그려냅니다. 사회의 부정성을 고발하는 것 못지않게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일상의 기쁨과 지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였다고 말하지요. 오웰의 더 ‘희망적’인 초상을 제시하는 이 책을 편집하면서 오웰에게서 배운 희망과 저항의 방식이 있어요. 구체적인 사랑과 즐거움의 대상을 찾을 때, 세상의 변화를 위해 내가 구체적인 행위를 하고 있을 때에만 비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에요. 직접 일군 밭에 씨를 뿌리고, 꽃과 나무를 심은 조지 오웰을 설명하며 솔닛은 “그는 또다시 미래를, 적어도 미래를 위한 희망을 심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거든요.
솔닛은 또 “가능성들을 알아보고 경고를 하기 위해 앞을 내다보려 애쓰는 행위 자체가 희망의 행위”라고 말하는 옥바티아 버틀러의 말을 인용하며 ‘경고’는 ‘예언’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미래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는 벗어나기. 저의 새해 목표 중 하나입니다. 아주 구체적인 행위에서 비롯되는 희망에 대해 함께 나누는 연말 보내시기를 바라며,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네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편집자 pip
|
|
|
솔닛 책에 솔닛 책 더하기 괜찮을까…… 망설이다가 첫 번째로 목록에 올려버립니다. 이 책에서도 아일랜드의 퀴어 독립영웅 로저 케이스먼트를 다루는 4장 「나비 수집가」를 『오웰의 장미』와 나란히 읽어보기를 추천해요. 솔닛은 어머니 쪽의 아일랜드 혈통 덕에 아일랜드 국적을 얻게 되고, 새로 생긴 여권을 “조상의 나라로 눈앞에 나타난 낯선 남의 나라”에서 정체성, 기억, 풍경 같은 개념을 탐구해볼 기회로 삼습니다. 아일랜드를 두 발로 밟아가는 여행과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학을 읽고 써나가는 여행, 두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솔닛만이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쓰인, 아주 특별한 여행기라고 할 수 있어요(책타래 4화).
케이스먼트가 수집해 기증한 자연사박물관의 나비 표본에서 시작되는 4장은 『오웰의 장미』가 오웰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듯, 케이스먼트가 얼마나 “매력과 경이를 느끼”게 하는 “사려 깊은 영웅”이자 “복잡한 인물”인지를 탁월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오웰이 늘 삶의 ‘빵’과 함께 ‘장미’를 추구하고 중요시했던 작가였듯, 케이스먼트 역시 참상 속에서도 ‘나비’의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이었음을 포함해서 말이죠.
“언젠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가 존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참상 속에 나비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을 맛보면 안 되는 것일까? 혁명가들과 활동가들이 줄곧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케이스먼트는 대답한다. 좋은 것을 맛보자. 청옥색과 유황색 나비를 잡으러 다니자. 강에서 수영을 즐기자. 일기를 쓰자.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끝없는 과업에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 그런 참혹한 순간에도 경험에는 어떤 복잡한 면, 단순화될 수 없는 면이 있을 것이라고 케이스먼트의 나비는 말하는 듯하다.”―104쪽
|
|
|
올리비아 랭이 2010년대 기고한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에요. “위기가 범람하는 세계 속 예술이 하는 일(Art in an Emergency)”이라는 부제가 직관적으로 와닿는데, 이 책에 엮인 글들을 잘 꿰어주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랭은 이 책에서 장미셸 바스키아, 데릭 저먼, 데버라 리비, 데이비드 보위, 존 버거 등 다양한 예술가들을 다루는데요, 이들의 작업이 어떻게 차별과 소외에 저항하는지, 예술이 어떻게 세계에 변화의 가능성을 가져오는지를 그들의 작업과 삶을 통해 들려줍니다. 한 꼭지 한 꼭지 읽어나가다 보면, 언제든 꺼내 보고 싶은 작가와 작업 몇 가지를 품게 되어요.
가장 인상적인 꼭지 중 하나가 ‘에이즈 대위기’의 1980년대에 활동한 영국의 영화감독이자 미술가, 작가 데릭 저먼을 다루는 글인데요. 『모던 네이처』라는 그의 책을 통해 “열정적인 정원사”이기도 했던 저먼을 만날 수 있어요. “정원 가꾸기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인 절망에 맞서 행하는 일종의 선제적 병용 요법으로, 저먼 특유의 활기 넘치고 생산적인 대응 방식이었다.”(190쪽) 랭이 읽어내는 저먼을 통해 정원을 가꾼다는 것, 예술가가 되고 정치적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음이 즐거워요.
|
|
|
지난 12월 12일에 열린 『오웰의 장미』 북토크에서 정용준 작가가 ‘장미’와 함께하는 저항의 한 방식으로 스스로 ‘즐거움의 목록’을 만드는 것에 대해 얘기했어요. 알고리즘에 의탁하지 않는 내 즐거움의 목록, 백과사전에 대항하는 글쓰기로서의 ‘문학’, 그리고 박물관에 맞서는 방식으로서의 ‘분더카머(Wunderkammer)’. 16~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진귀한 사물들을 모아둔 공간을 뜻하는 분더카머는 전시물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수집·분류하는 박물관·미술관과 달리, “개별 소유주의 독특한 취향과 정신 세계를 반영하고 극화”하는 곳입니다.
문학평론가 윤경희의 『분더카머』는 제게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분더카머를 구축하고 나누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이 책은 부서지고 깨지고 닳은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로 가득한 작가의 머릿속 분더카머를 펼쳐 보입니다. 그 방 안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꿈, 고문헌의 삽화, 문학, 미술 작품, 사유의 조각 등이 가득한데요, 그 속을 헤매다 보면 언어가 이런 고유한 방식으로 내밀한 어떤 감각, 욕망, 감정에 다가갔다 물러나는 움직임을 선사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에 빠지게 됩니다.
“분더카머를 재해석하는 현대의 몇몇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분더카머는 개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겪어온 고유한 역사와 기억의 진열실이자 마음의 시공간의 상징체다. 기억이란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훨씬 거대한 망각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 안에는 결코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깨진, 닳은, 기원과 이름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석여 공존한다.”―19쪽
|
|
|
『오웰의 장미』에서 솔닛은 “이 책은 서가의 전기 칸에 한 권을 더하려는 것이 아니”며, “한 작가가 몇 그루 장미를 심었다는 그 행위를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서 뻗어나가는 일련의 탐구가 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이 책은 다양한 전기 등을 자료 삼아 쓰일 수 있었고, 이 책을 읽고 나면 전기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오웰의 삶을 알아보고 싶어져요. 아쉽게도 솔닛이 참조한 오웰의 전기들이 국내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북미나 유럽만큼 잘 쓰인 전기가 활발히 편찬되지 않는 국내 출판 상황이 다시 한번 아쉬웠어요.
전기에 대한 관심에서 읻다 출판사의 서평 무크지 《교차》 3호를 보게 되었어요. 《교차》 3호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영웅에서 철학자, 예술가, 과학자, 무명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을 기술해온 전기 장르를 ‘고찰’합니다. “글은 과연 한 삶의 양적 방대함과 질적 다층성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는가? 삶의 풍부함과 글의 빈약함을 숙명처럼 맞닥뜨린 전기 작가들은 이 예정된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우리는 이 실패의 기록들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보도 자료에 적힌 인상 깊은 질문들을 보고, 책을 펼쳐 가장 궁금한 전기에 대한 서평부터 차례로 읽고 있어요. “여러 목소리들이 ‘평전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일련의 담론들을 배치한” 미셸 푸코의 『나, 피에르 리비에르』, 바버라 매클린톡이라는 여성 유전학자의 삶을 통해 20세기 유전학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이블린 폭스 켈러의 『유기체와의 교감』 등을 읽고 싶어졌는데요, 다종다양한 책들과 이어지는 독서 또한 서평지의 매력이겠지요.
“고유한 활동으로서 전기는 인간이 삶과 글 사이에 본질적 관계를 설정한 문화의 산물이다. 이 문화 속에서 형성된 인간이라면 망각과 죽음으로 떨어지는 삶을 글로 가로채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것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단지 살기만 했다면 삶을 느끼지도,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삶은 텍스트의 구조와 문체와 의미망에 따라 인식된다. 전기는 삶을 글로 옮기는 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글을 통해 비로소 살게 되는 일이다. 쉽게 쓴 이 문장이 얼마나 많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함축을 지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17쪽
|
|
|
(주)사이언스북스 banbi@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6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