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저의 목표 중 하나는 취미 가꾸기예요. 단, 영화·드라마·그림·책 ‘보기’와는 다른 활동, 시각 외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쓰는 활동으로 말이에요. 그 이유는 오늘 소개할 책과 연결돼 있는데요. 『거기 눈을 심어라』는 문학·철학·대중문화 콘텐츠가 시각장애(인)를 어떻게 재현해왔는지를 살피는 문화사이자 문학비평이면서, 시력을 잃어간 자신의 경험을 엮은 독특한 에세이이기도 해요. 이 책과 함께 작년 12월을 보내면서 보는 행위, 보이는 것들이 주는 감응에만 치우쳐 살아왔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강렬하게 깨달았고, 그 한계를 벗어나보고 싶어졌어요.👀
“보는 것이 곧 지식이요, 보지 못하는 것은 곧 무지”라는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생각은 서구 문화뿐 아니라 근대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관념이지요. 시각장애인 작가·공연예술가·교육자인 M. 리오나 고댕은 감각기관 중 눈을 가장 우선시하고 시각만을 지식 생산의 근거로 삼는 시각 중심주의, 나아가 비장애 중심주의에 호쾌한 반격을 가합니다. 다양한 텍스트 속 눈먼 인물의 이야기나 시각장애 당사자들의 기록을 불러오는 방법을 통해서요. 수많은 읽을거리의 재미, 그에 대한 저자의 유머러스하고 예리한 해석에 빠져들다 보면 장애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게 되고요.👁️
올해 첫 책타래는 어둠과 밝음, 눈멂과 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알 수 없는 “얼룩덜룩하고 광활한 지대”가 궁금한 독자들에게, 『거기 눈을 심어라』와 세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편집자 p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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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거기 눈을 심어라』의 원서를 검토할 때 서문에서부터 여기저기 밑줄을 긋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위인’ 헬렌 켈러의 글을 몹시 읽고 싶게 만든다는 데 반해서요. 저자 고댕은 켈러가 100년도 더 전에 남긴 글을 인용합니다. “모든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전적이다. 그러나 자기 기록을 하는 많은 이에게는 적어도 주제 변경이 허용되는 반면에 내가 관세나 천연자원 보존, 드레퓌스라는 이름을 둘러싼 갈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비장애인중심주의적 사고를 이처럼 날카롭게 들추어내는 켈러라니 매력적일밖에요.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납작한 시각을 집어내니 뜨끔하지 않을 수 없고요.
이어서 고댕은, 교사 설리번이 물 펌프 옆에서 어린 켈러의 손바닥에 “water”라고 쓰는 장면이 켈러를 다룬 위인전이나 대중서사의 절정으로 등장하곤 하지만 켈러는 이후 80년을 더 살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고서 이렇게 말하죠. “켈러를 일곱 살 때의 해피엔딩으로 포장하는 것은 감상적인 어린이책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깔끔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같고, 켈러의 이야기가 비장애인에게 희망과 감사를 느끼게 해주는 역경 극복의 단순한 문제라는 인상을 준다. 그 이야기는 그녀에게 복잡한 성인기가 있었음을 부정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계속해서 성인기의 페이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복잡함을 품은 성인 켈러가 느끼고 생각한 바를 담은 에세이 『내가 사는 세계(The World I Live in)』는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고 저도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요. 하지만 『거기 눈을 심어라』가 전하는 켈러의 통찰을 접하고 나면 너무 읽고 싶어지는 것만은 분명해서 첫째로 소개합니다.(여기에서 전문을 읽으실 수 있어요.)
“넓고 밝은 시각의 길을 걷는 일부 비평가의 후각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를 격려하며 정보를 주고 내 삶을 확장해준 냄새의 감각이 덜 즐겁다고 할 수는 없다. 수줍고 순간적이며 종종 눈에 띄지 않는 감각이 없다면, 그리고 미각·후각·촉각이 주는 확실성이 없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우주관을 내 우주관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거기 눈을 심어라』, 76~77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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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댕이 문학사의 정전부터 대중문화의 아이콘까지 다종다양한 텍스트를 눈멂이라는 키워드로 새롭게 읽어낸다면, 미디어 연구자 케이티 엘리스는 『장애와 텔레비전 문화』에서 디지털 시대의 영상 콘텐츠가 장애를 어떻게 재현하는지, 디지털 환경에서 장애인의 접근성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합니다.
『거기 눈을 심어라』를 읽고 나면 잊을 수 없는 개념 중 하나는 이른바 ‘영감 포르노(inspiration porn)’일 거예요. 이는 장애인의 존재를 “비장애인에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씩씩한 개인의 힘을 믿게 만드는 식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이야기”로 소비하고 대상화하는 것을 뜻하는데요. 『장애와 텔레비전 문화』에도 이 개념이 중요하게 언급돼요. 코미디언이자 저널리스트인 스텔라 영이 “미디어와 사회가 장애인을 감화[영감]의 존재로 구축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TEDx 토크 영상과 그것이 큰 조회 수를 기록한 현상이 재현의 다양성을 증진하는 통로가 되는 온라인 비디오의 사례로 다뤄집니다. 영의 영상이 널리 공유되면서 장애 담론이나 장애인 공동체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살펴보고요. 또 다른 장에서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어떻게 전형적인 장애 클리셰에서 벗어났는지를 분석하기도 해요.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많은 이들은 미디어에서 일하는, 더 많은 장애인이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그것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회복하도록…… ‘고안된’ 그런 종류의 연민 포르노 이야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4~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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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악상을 받아 적어 음악을 완성하는 천재 예술가, ‘악성(樂聖)’이라 일컬어지는 베토벤의 초상에서 고댕이 말하는 ‘초능력을 가진 맹인 슈퍼히어로’, 또는 “초능력적 장애인의 스테레오타입”(『장애와 텔레비전 문화』, 125쪽)을 읽어낼 수 있겠지요. 베토벤의 생애 역시 쉽게 청각장애를 ‘극복’한 서사로, 영감 포르노로 소비되고요. 『소리 잃은 음악』은 이런 프레임에서 벗어나 청력 잃은 베토벤의 창작 행위와 음악의 위대함에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으로 접근합니다.
음악학자 로빈 월리스는 아내 바버라의 청력 상실을 10여 년간 지켜보면서 얻은 통찰과 문제의식으로 비슷한 청력 문제를 겪었던 베토벤의 말년을 새롭게 탐구해요. 보조기기를 활용한 청력 훈련 과정, 인공와우 이식 수술 후의 청각 학습 과정 등을 함께하면서 뇌의 소리 인식 메커니즘, 음악의 시각적·물리적 측면을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이해해갑니다. 그리고 베토벤이 남긴 방대한 양의 스케치와 자필 악보를 살피는 것은 물론, 그가 사용했던 나팔형 보청기 등 다양한 ‘청취 기계’와 작곡 도구, 피아노 등을 연구합니다.
『거기 눈을 심어라』는 보행용 지팡이부터 망원경, 현미경 등의 시각 장치, 점자와 반향정위(反響定位)의 과학, 각종 디지털 기기 같은 테크놀로지의 영역을 다루는데요. 두 책을 나란히 놓고 보면 몇 배 더 흥미 있는 독서를 할 수 있어요. 시각·청각장애인과 시각·청각손상인이 현실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도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과 인식에 관한 선입견 너머로 다른 이해의 지평이 열리는 듯합니다.
“이런 건강함은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틀에 박힌 기존의 시각과 달리, 우리 같은 범인 모두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다. 바버라처럼 역경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주어진 것을 활용하고 한계를 받아들이며 살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바버라의 귀를 통해 베토벤을 들으며, 우리는 베토벤의 삶이 영웅적이기보다 인간적이었음을, 비극적이기보다 전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음악에 나타난 영적 성장은 독불장군이 쌓은 자기만의 업적이 아니었다. 그는 귀가 먼 덕분에 더 인간적이고 더 보편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314~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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