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퇴박을 당하거나 싫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명 작가가 살았던 집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원치 않는 관심이 부담스러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울타리 너머로 과일나무들을 들여다보고 문간에서 한두 마디 물어보는 게 고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엄 램—잿빛 고수머리의 여윈 노인으로, 스코틀랜드 억양이었다—은 명랑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는 샘의 편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답장하지 않은 것을 사과하며 아직도 우리에게 보내줄 자료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우리를 뒤뜰로 안내해 정원에서 일하고 있던 파트너 돈(Dawn) 스패뇰과 인사시켜주었다.
돈은 몇 년 전 그 집이 매물로 나왔을 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고, 그레이엄에게 얘기했더니 그가 당장 집을 보러 달려왔다고 했다. 그들은 즉시 그 집을 샀는데, 너무 작고 비좁아서 휴일에 가족을 초대하기에 부적당하며 바닷가나 상점과 펍이 가까운 데서 살고 싶다는 평소의 바람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서 한 일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한때 그 집이 가게였고 바로 이웃집이 펍이었으니 된 거 아니냐며 농담을 했다. 그는 작가가 살던 집이라는 점이, 그녀는 정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은 마을이었다고, 그들은 덧붙였다. 오웰이 심은 과일나무들은 1990년대에 뒤뜰의 창고를 확장하면서 베어버려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웃집의 나이절은 그곳에 산 지 훨씬 더 오래되었다기에 우리는 나이절을 만나러 갔고, 그의 집 뒤뜰을 이리저리 돌아가 거기에서 함께 돈과 그레이엄의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 과일나무들은 나이절의 기억 속에, 그러니까 그의 사에쿨룸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그 나무들이 한때 거기 있었다는 것이 전부였고, 그중 몇 그루의 마지막 흔적이었을, 담쟁이에 덮여 눅눅하게 썩어가는 둥치밖에는 볼 것이 없었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이엄은 내게 약 50년 전에 찍은 그 집의 컬러 항공사진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도 나무들이 녹색 덩어리로만 나와 있었고, 어떻든 중요한 것은 그 과일나무들이 이제 없다는 것이었다. 집 내부는 하얀 석고 벽에 어두운 빛깔의 목재로 되어 있었고, 지붕이 낮은 작은 방들이 보기 좋고 아늑했다. 내가 오웰과 관련지어 떠올림 직한 어떤 것보다도 그랬다. 그가 집에 대해 말한 것은 대체로 암울하게 들렸으니 1936년에는 가스, 전기, 실내 화장실 같은 현대적 설비도 없었을 테고, 이엉을 얹은 지붕도 당시에는 양철 지붕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그 집에 사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레이엄은 내게 오웰이 서재로 쓰던 부엌 옆방과 당시 가게 역할을 하던―돈과 그레이엄은 거실로 쓰는―그다음 방 사이의 나지막한 출입구를 보여주었다. 키 큰 오웰은 매번 고개를 숙였든가 아니면 상인방에 머리를 찧었을 것이었다. 문에는 몇 개의 틈새를 내어 작업 중에도 손님이 들어오는지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정원의 나무들은 없어졌지만, 나이절을 만나고 나무 그루터기를 돌아보고 사진들을 보고 나자, 그들은 오웰이 심은 장미들은 아마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고, 과일나무에 대한 실망이 갑자기 흥분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관심이 일었다. 우리는 다시 정원으로 나갔고, 그곳에는 그 11월의 날에도 멋대로 자란 커다란 장미 두 그루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 그루에는 연분홍 꽃봉오리가 조금 벌어져 있었고, 다른 한 그루에는 거의 새먼핑크 빛깔의 꽃이 피었는데, 꽃잎들의 밑동은 금빛이었다. 따져보면 여든 살은 되었을 이 나무들은 왕성하게 살아 있었다. 이 살아 있는 나무들을 심은 살아 있는 손(과 삽질)의 주인은 그 여든 해 중 처음 몇 년 사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 그레이엄의 말로는 장미들이 워낙 많이 피어서 오웰이 임차를 끝낸 후 1948년에 그 집을 샀던 교사 에스더 브룩스는 그 장미를 마을 축제의 입장권으로 썼다고 한다. 1983년에 그녀는 오웰이 심은 알버틴 장미가 “정원의 영광”이며 “아직도 핀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의 장미들은 1939년 11월에도 피고 있었으며, 오웰은 그의 가사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은 패랭이꽃들을 거둬내고, 바람에 쓰러진 국화들을 세워 묶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니 오후에 많은 것을 하기가 힘들다. 국화는 지금이 한창인데, 대개 어두운 적갈색이고, 몇 그루는 보기 흉한 보라색과 흰색이 섞인 것이라 패어버려야겠다. 장미나무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려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제 정원에는 꽃이 없어질 것이다. 갯개미취 철도 지났고, 일부는 패어버렸다.”6 그를 알았던 거의 모든 사람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장미들은 오웰을 포함하는 일종의 사에쿨룸이다. 나는 문득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 에세이의 살아 있는 잔재와 마주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그에 대한 내 오래된 생각들을 새롭게 해주었다.
두 그루 장미가 그에 대해, 또 장미와 과일나무에 관한 오래전의 에세이에 대해, 그리고 지속성과 후세에 대해 갖는 관계의 직접성이 나를 기쁨으로 들뜨게 했다.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와 프로파간다에 대한 선견지명으로, 불유쾌한 사실들을 직면하는 것으로, 건조한 산문체와 굴하지 않는 정치적 견해로 유명하던 작가이다. 그런 그가 장미를 심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나 공리주의자, 실용주의자나 또 아니면 그저 실제적인 사람이 과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과일나무는 가시적인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고 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산물―물론 그 이상이지만―을 내니 말이다. 하지만 장미 한 그루를―또는 그가 1936년에 복구한 이 정원의 경우처럼 일곱 그루를, 그리고 나중에는 더 많이―심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나는 30년도 더 전에 처음 읽은 그 에세이 속의 장미들에 대해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장미라니, 오웰에 대해 내가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던 전통적인 시각을 접고 그를 더 깊이 알아보라는 초대와도 같았다. 그 장미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이자,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계량 가능한 실제적 결과가 없는 시간들이, 정의와 진실과 인권과 세상을 변혁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어떤 사람의 삶에, 어쩌면 모든 사람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