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일부터 5일에 걸쳐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렸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정상 개막한 도서전에 정말 많은 독자분들이 찾아주셨는데요.(노란 티를 입고 독자분들을 맞은 저희를 보셨을까요?💌) 반비 편집부는 부스를 찾은 독자들의 눈과 손과 다리의 흐름을 열심히 쫓는 한편, 다른 출판사의 책을 틈틈이 구경했습니다. 오늘은 도서전에서 만난 책들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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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절린드 크라우스 지음, 김지훈 옮김, 현실문화A, 2017
‘2022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어 전시되었던 책입니다. 이 전시에서는 각각의 책이 놓인 서로 다른 조건(대상 독자, 출간 배경, 시장에서의 포지션 등) 아래에서 할 수 있는 한 멀리 나아간 북디자인의 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책을 기억해두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인문사회서를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참고할 만한 내지 디자인이 인상 깊었기 때문인데요. 『북해에서의 항해』는 벨기에 개념미술가 마르셀 브로타스의 동명의 작업에서 따온 제목으로, 미술비평가 로절린드 크라우스는 이 책에서 현대미술과 ‘매체’의 문제를 탐색합니다. 고맥락의 텍스트이기에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 많고, 필연적으로 다수의 저자 주와 역자 주가 붙게 되었습니다. 두 종류의 주석을 모두 본문과 같은 페이지 안에서 소화하면서도 판면 여백을 활용함으로써 독자들의 피로감을 덜어주고 좀 더 유기적인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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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를 주로 출간하는 이음 부스에서 만난 책이에요. 이음 부스의 편집자께서 책 소개를 해주시는 걸 듣고 단박에 이끌린 책인데요. 책의 카피는 이렇습니다. “이 시대의 프랑켄슈타인 박사, 선웅 교수. ‘진짜 뇌’를 만든다” 저자이자 신경발생학 연구자인 선웅은 ‘미니뇌’를 만들고 있습니다. 미니뇌? 처음 들어보는 연구였어요. 얼핏 인공지능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인간 뇌와 작동 원리가 다른 인공지능과는 다른 ‘진짜 뇌’를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인간의 기관 중에서도 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기관이라고 하는데, 미니뇌를 만듦으로써 인간 뇌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이 책은 미니뇌의 이론, 설계도와 재료, 만드는 방법과 원리를 설명하며 나아가 저자 자신이 연구 과정에서 마주치는 고민까지 전달하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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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노동자들은 우스갯소리로 도서전을 두고 ‘홈커밍데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평소에는 서로 바빠서 만나지 못하던 다른 출판사의 동료들과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부스가 마감해가던 파장 직전에 동료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일러스트레이터 키박 작가의 첫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키박 작가는 반비의 책 『취한 날도 이유는 있어서』의 멋진 표지를 그려주시기도 했습니다.) 역동적이고 시원시원한 신체 표현과 힘 있고 거침없는 컬러 사용이 인상적인 작업을 하는 분인데요. 『원숭이, 도시에 살다』는 키박 작가가 직접 그리고 쓴 그림책입니다. 주인공 원숭이를 작가의 페르소나 삼아,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며 자기만의 오아시스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책”(딸세포출판 인스타그램, ‘딸세포와 친구들 인터뷰’ 중에서)이라고 해요. 안타깝게도 이미 완판이라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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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번 도서전에서 독립출판, 아트북 섹션의 책들을 주로 구매했는데요. 오프라인 도서전은 역시 발견의 기쁨을 안겨주니까요. 이 책 『블랙 유니콘』을 산 것처럼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잊었던 책을 드디어 만나게 되기도 하고요.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노블로 잘 알려진 '움직씨' 출판사처럼 애정하는 책을 만든 분들을 직접 만나는 반가움도 느낄 수 있어요.
오드리 로드의 책 두 권이 한국에 출간되어 있습니다. 대중적으로도 가장 잘 알려진 시집인 이 책과, 산문 및 연설을 모은 선집 『시스터 아웃사이더』. 『시스터 아웃사이더』는 미국에서 1984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2018년의 제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말하기의 의미와 방법과 태도를 힘 있는 언어로 알려준 책이었어요. 인용으로 로드의 시를 종종 접한 분들도 많을 텐데요, 시집으로 만나는 로드의 말과 은유는 그의 산문과 같고도 다르게, 낯설지만 아름답게, 시원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대적인 세계로 독자를 이끌고 갑니다. "나는 여성이었다 / 아주 오래전부터 / 내 미소를 조심하라 / 나는 오래된 마법과 / 정오의 새로운 분노 / 당신에게 약속된 / 드넓은 미래를 품은 위험한 존재 / 나는 / 여성이고 / 백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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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실 해밋, 김다은·황은영 옮김, 린틴틴, 2021
대실 해밋을 알게 된 건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의 구판을 읽으면서였어요. 「펜티멘토」라는 글은, 젊은 노라 에프런이 선배 여성 작가 릴리언 헬먼을 "우상화"했다가 그와 깊은 교류를 나누게 된 후 그가 "그저 인간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과정을 통렬하고 빼어나게 담아내고 있는데요. 글의 강렬한 여운 속에서 릴리언 헬먼의 연인으로 언급되는 대실 해밋의 이름 또한 잊히지 않았어요.
대실 해밋은 하드보일드 문학의 전형을 이룬 작가입니다.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 영상처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표현, 속도감 있는 대화 등으로 구현해낸 탐정 스페이드는 이후 어떤 원형이 되어 무라카미 하루키, 레이먼드 챈들러, 코엔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등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지요. 대실 해밋의 작업 세계를 포함해 이 책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책의 맨 뒤 '냉혹하고 유쾌한 탐정 이야기를 모아 내며'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편집부가 남긴 짧은 글을 읽으면서 이미 해밋의 스페이드에게 애정이 쌓이는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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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D. 로스블럼·캐슬린 A. 브레호니 엮음, 알.알 옮김, 봄알람, 2021
『보스턴 결혼』을 처음 만난 건 긴 휴학을 마치고 복학한 학교 도서관에서였어요. 연애나 사랑, 또 또래 여자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답답함을 많이 느끼던 때이기도 했어요. 일반적인 '연애', '우정' 등으로 라벨링할 수 없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두 엮은이의 글에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친밀성의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력한지, 내 감정이나 내가 맺는 관계를 거기에 맞추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목 ‘보스턴 결혼’은 "19세기에 결혼하지 않고 둘이 함께 살며 깊은 우정을 나눈 독신 여성들을 이르던 말"입니다. 여기에 "새로이 이름을 붙여주면서 지금까지 우리를 제한하던 섹스와 연애의 관념을 넓히려고 저자들이 빌려온 개념"이 19세기의 ‘보스턴 결혼’인 것이지요. 2012년 출간 후 절판되었던 이 책이 2021년 재출간되었는데요, 그만큼 19세기 여자들의 관계와 이야기가 2020년대 한국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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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책타래를 읽고 계신 여러분은 지난주 있었던 서울국제도서전에 방문하셨을까요? 어쩌면 진열된 반비 책 주변에서 서성이던 저와 스친 분도 계실 것이고 여러 사정으로 아쉽게 참석하지 못한 분도 계실 것 같아요. 전주에 사는 제 친구도 후자에 속했는데 그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책을 건네는 사람과 책을 찾는 사람이 대면하는 장소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러다 동아시아 부스에서 이 책을 발견했어요. “더미로 쌓인 무수한 책들이 아니라 선택된 책들이 있는 작은 공간들”이라는 카피가 이번 도서전과 동네 구석구석에 놓인 책방을 아우른다고 생각했어요. 작은 서점을 따라 전국을 도는 저자의 여행을 함께 하며 책 만드는 사람과 책 읽는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서울 바깥 도서전의 가능성을 상상해보고 싶어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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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노리스, 김영준 옮김, 마음산책, 2018
이번 도서전에는 좋은 프로그램이 참 많았어요.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리단 작가님이 진행하신 북토크도 너무 궁금했는데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해서 무척 아쉬웠어요. 이렇게 아쉽게 놓친 프로그램이 하나 더 있었는데 25년간 《뉴요커》의 오케이어로 있었던 메리 노리스의 강연이었어요. 오케이어는 《뉴요커》에 실리는 모든 글의 최종 교열과 편집, 감수를 맡는 직책이에요. 쉼표를 뗄지 말지 하루 종일 고민하던 날 기사에서 메리 노리스와 오케이어에 대해 읽게 됐는데, 25년 동안 이런 일을 지속한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일에 임했을지가 너무 궁금했어요. 쌓인 책이 많아 이 책의 구매는 뒤로 미루어 놓았었는데 일정 탓에 강연을 놓쳐 반쯤 충동적으로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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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스 스벤젠, 이세진 옮김, 청미, 2019
여름 도서전 분위기에 걸맞게 알록달록한 책들 사이로 잿빛 표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도서전같이 사람이 굉장히 많은 공간에 있을 때면 어쩐지 외로워지곤 해서 이런 감정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뿐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도 느껴지는 흔한 감정인 만큼 그것을 긍정하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뒷받침하는 근거 없이 그런 주장들이 일종의 선언으로서 던져질 때면 마음을 열고 인정하기가 어려웠어요. 그것이 참인지 자꾸 의심하고 반박하게 됐죠. 아직 책을 전부 읽지 않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책 한 권 분량으로 근거 짓는다면 애매한 이 감정에도 나름의 설명이 붙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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