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하드디스크에는 책에 다 실리지 않은 자료가 얼마나 많을까? 책타래 #20에서도 소개한 건축학자 박철수 교수는 단연 ‘그 사람의 아카이브’가 궁금한 저자 1위입니다. 『아파트』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 『한국주택 유전자』 같은 독보적인 책을 내왔는데, 거의 매 책이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총망라’ ‘종합판’ ‘샅샅이’ 같은 단어와 더없이 어울리는, 한국 주거문화사에 관한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연구를 담고 있어요.(SNS로도 발견한 자료들을 공유해주시곤 하는데, 그 많은 자료를 어떻게 관리하고 어떤 작업 환경에서 일할까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런 저자가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쓴 이 책은 식민지 경성의 1930년대를 ‘아파트의 시대’라 명명합니다. 경성의 아파트에 관한 육하원칙에 답하듯, 아파트가 경성 어디에 얼마큼 있었고,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생겼고, 누가 얼마를 내고 그곳에 살다가, 어떤 사건사고를 겪었는가 하는 다양한 질문들의 답을 찾아가며 가히 그 ‘시대’를 복원해냅니다. 이런 복원을 위해서 국가기록원, 서울역사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미국문서관리보관소, 일본 국립도서관, 사기업 아카이브 등의 수많은 소장 사료를 살피고, 신문, 잡지, 문학을 활용하죠. 심지어 30~40년대 발행된 ‘전화번호부’를 통해 아파트의 분포와 변화를 분석해내는 장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와요. 수많은 특별한 자료가 도판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니 사진, 지도, 삽화만 하나하나 보고 있어도 흥미로운 책입니다.
한편 도심 한복판에 들어선 경성의 아파트들은 “울타리라곤 찾아보기 힘든 복합용도의 도시건축”, “길거리를 오가는 누구나 편안하게 들고 날 수 있는 근대도시의 특별한 장소”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아파트와 달라도 많이 달랐”는데요. 『가장 도시적인 삶』에서 말하는 상가아파트의 미덕이 초창기 아파트들의 특성임을 알 수 있어요. 복합성, 외부 이용자의 접근성, 보행자 친화성, 가로와의 상호작용으로 도시의 활력에 기여하는 건축의 오래된 미래가 두 책 안에 있습니다. “거의 100년에 가까운 지난 시대의 세상을 살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조각난 기록자료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지금도 어딘가에서 무언가 기록하고 있을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통해 응원과 격려를 더불어 전하고 싶다. … 존재와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이 건축물의 속성이자 운명이라 하더라도 한때 누군가의 모든 세계였을 집에 대한 기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모든 기록자와 답사가의 것이기도 하다.”―15쪽 ‘방대한 양의 사료를 다루는 사람은 어떻게 작업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이고 영감을 주는 책입니다. 저자 아를레트 파르주는 파리 형사사건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주로 연구해온 역사학자예요. 그는 자신이 연구하는 18세기 형사사건과 관련한 대량의 문서, 일명 ‘바스티유 아카이브’에 대해 “역사와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 등장인물의 삶, 그런 삶의 몇몇 순간”, “사소한 것과 비장한 것이 똑같은 일상적 어조로 펼쳐지는 곳”, ‘진실의 작은 조각들이 좌초해 있는 곳’이라 일컫습니다. 이 책을 따라 역사가의 작업 방식을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어요. 파르주는 문서를 읽고 베끼고 분류할 뿐 아니라, 깃털 펜의 자국, 헝겊 편지, 씨앗 봉투처럼 문서에 남은 흔적을 손끝으로 만지고 감각하면서 그것의 뜻과 의의를 연구해요. 궁극적으로는 질문을 던지고 자료를 해석하고 의미화함으로써 역사를 써나갑니다. 이러한 연구 과정에 긴 시간을 쏟아온 학자의 통찰과 단상, 아카이브를 대하는 태도는 빛나고, 사이사이 등장하는 도서관 열람실 최고의 좌석을 얻기 위한 경쟁, 소음에 예민해지는 신경질적인 열람실 풍경 등은 여유로운 웃음을 줍니다. 성실한 기록의 중요성과 실물을 마주하는 경험을 동시에 강조하는 『가장 도시적인 삶』의 대목들도 환기되네요. “작업자가 아카이브에서 읽게 되는 말이나 만지게 되는 물건, 곧 아카이브에 남겨져 있는 흔적은 실재했던 것의 형상이 된다. 먼 과거에 실재했던 것의 증거가 드디어 가까운 이곳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카이브가 앞에 펼쳐지면서 작업자에게 ‘실재를 만지는’ 특권을 안겨주기라도 한 것처럼.”―19쪽 ‘기계비평’이라는 개념과 분야를 개척한 기계비평가 이영준의 대표작입니다. 기계의 ‘비밀스러운’ 속 구조(기계의 메커니즘, 기능, 재료 등)와 인간적 맥락(인간의 욕망, 필요, 시스템, 담론 등)을 다뤄 기계를 이해하고 해석해 가치를 따지는 것이 기계비평이죠. 저자는 기계비평의 근거로 기계와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사는 “기계인간의 출현”을 들어요. 해서, 이 책이 다루는 비평의 대상은 자동차 운반선, 디젤기관차, KTX, 항공기, 부산항 등입니다. 그 외에도 대형 컨테이너선이라는 기계에서의 항해를 기록하고(『페가서스 10000마일』) NASA가 기록한 각종 과학 이미지를 다루거나(『우주 감각』), 도시나 사진을 비평할 때에도 사람보다 인프라와 기계장치에, 위성사진처럼 기계가 찍은 사진에 관심을 둡니다(『초조한 도시』 『이미지 비평』). 물론 이영준의 책에는 다종다양한 기계의 이미지와 자료가 잔뜩 실려 있습니다. 이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어디에 섰을지, 이 도면·도표·수식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연구했을지 상상해보면, 기계에 대한 저자의 마음은 ‘진짜다(...)’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데요. 덕분에 우리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광경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기계의 이해에 사뭇 다가갈 수 있게 됐습니다.
“빈 철길만 봐도 어린애같이 가슴이 뛰는 나 같은 인간이 그런 평론을 할 수 있을까? 평론은 논쟁의 장에 뛰어들어 특정한 자리에 깃발을 꼽고 그런 위치 설정의 리스크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일인데, 냉정하지 못한 평론가가 어떻게 기계를 다룰 수 있을까? 기계비평이 가능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기계의 예술’과 ‘예술의 기계’라는 변증법 때문이다. 즉 기계가 예술 못지않게 아름답고 파란만장한 감각의 삶을 살아온 이력이 있는 한 그것은 비평적 해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31쪽 |
책과 책을 잇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