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에서 솟아오르는 분홍색 불길을 표지에 담은 이 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결정지은 지역으로 여겨진 ‘러스트벨트’의 여성 철강 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저자 골드바흐는 녹슨 지대라는 뜻의 러스트벨트, 과거 미국 제조업이 흥했던 지역이지만 사양 산업이 된 후 불황이 찾아온 이 지역에 속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출신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석사 과정에 진학하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재발한 양극성장애 때문에 학위를 받지 못하고, 이후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의 제철소에 입사합니다. 골드바흐는 새내기 철강 노동자로서 위험천만한 작업 환경에 점차 익숙해지고 동료 노동자들의 경험과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이와 나란히 전개되는 것은 미국의 밀레니얼 여성으로서 골드바흐의 경험입니다. 개인이 노력하기만 한다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교육받으며 자라난 세대, 그러나 여전히 공고한 성차별과 경제 위기와 사회의 양극화라는 여러 겹의 벽에 부딪히며 좌절하게 된 세대. 이 책은 한 밀레니얼 여성이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을 어떻게 미국이라는 사회의 맥락에서 해석하게 되는가, 그 과정을 담아낸 책이기도 합니다. 골드바흐가 제철소에서의 노동 그리고 평생을 철강 노동자로 살아온 클리블랜드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재해석의 힘을 얻게 됩니다. 책의 기저에는 줄곧 쇠락했지만 강인하고 존엄을 아는 고향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고향 캔자스를 변함없이 애정 어린 시선과 자부심을 갖고 바라보는 『하틀랜드』를 떠올리게끔 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빈곤의 경험을 한 두 여성 저자의 이야기를 나란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는 끔찍한 실패로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만들었다. 또 계속 베풀었다. 또 계속 모형 차를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더 중요하게 그는 공갈꾼 몇이 열정을 앗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를 클리블랜드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러스트벨트에서의 삶과 노동이 의미하는 바였고 트럼프가 우리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바였다.”―『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190쪽 위의 두 책이 미국 빈곤 계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이 책은 한국 경제의 격변기에 실질적 생계부양자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 김은화는 어머니 박영선 씨의 구술생애사를 채록해 이 책을 엮어냈습니다. 평생 가난과 성차별과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노동하고 사업을 꾸리고 재테크를 하며 두 자식을 길러낸 박영선 씨의 이야기는 수많은 그 세대 어머니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박영선 씨의 생애를 읽어나가며 당시 공장 노동자였던 젊은 여성들을, 집값이 오르던 시기 야무지게 재테크를 해 자산을 불린 엄마들을 생생하게 만납니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인 역사의 기록이 되는 구술생애사의 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된 책입니다. 『하틀랜드』와 이 책을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이 어머니와 딸 사이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 제 주변 많은 여성 독자들이 이 책의 제목을 듣고 “정말, 맞다!”라며 공감했습니다. 전통적인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뒤에 사실은 가족들을 ‘먹여 살린’ 엄마들이 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가장 가까이에서 엄마들 삶의 고투를 지켜봐온 딸들입니다. 은화 씨와 영선 씨의 대화도 이런 동지의식, 안타까움, 서러움, 원망, 고마움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들 위에서 펼쳐집니다. 이 책은 엄마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던 딸과 내 딸은 차별 없이 키우고자 했던 엄마가 서로의 생애의 못 보던 면을 차츰 헤아려가는 과정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엄마를 알아주기로 했다. 그 시작은 제대로 된 호칭을 붙여 주는 일이다. 엄마는 그간 가족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나 생계부양자 같은 호칭은 남성에게만 명예롭게 주어졌다. 나는 여기에 대항해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다고, 아니 살렸다고, 그녀의 노동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엄마는 우리 가족의 생계부양자이자 진정한 가장이었다고 말이다.”―『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 16쪽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대런 맥가비의 『가난 사파리』는 이 질문에 대한 시적이고도 현실적인 답변입니다. 대부분 빈곤 계층 저자의 책이 특정한 사회적 성공담으로 귀결되는 반면, 맥가비는 여전히 빈곤에 발을 딛고 선 가난의 내부자로서 빈곤의 정신적 풍경을 안내합니다. 저자는 로키라는 랩네임으로 활동하는 래퍼인 동시에 교도소 재소자 대상 랩 워크숍 진행자, 청소년 대상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장담과 빈곤을 둘러싼 전방위적 사회비평을 엮어내 위트 있고 통렬한 책을 써냈습니다. “죄와 벌”, “1984”, “트레인스포팅”처럼 관련된 책 제목이 붙은 32개 장의 글들은 이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되도록, 마음에 드는 장부터 읽어도 무방하도록 각자의 완결성을 지니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언어에서 길을 찾았지만, 그것이 전통적인 방식의 독서는 아니었던 맥가비의 경험에서 비롯된 선택입니다. “나는 이 책에서 관습적이지 않은 내 읽기 습관을 포함해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처럼 책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책을 쓰려 한다. 그들을 초대해 부담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드나들면서 정해진 순서 없이 조금씩 읽거나 길이가 더 짧은 장을 하나씩 골라 읽을 수 있게 하려 한다.”―『가난 사파리』, 23쪽 끝으로, 이번 책타래에서 소개한 저자들은 모두 80년대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가 자라온 국가와 지역과 계층과 사회에 따라 사뭇 다른 경험을 하며 자라났습니다. 개인의 경험이 그 사회에 관해 무엇을 이야기해주는가에 대한 훌륭한 사례들로서 이 책들을 읽어보시는 것도 제안해봅니다. 이번 책타래 어떻게 보셨나요? |
책과 책을 잇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