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서점에서 일하다가 시력을 잃어가던 대문호 보르헤스를 만나 4년간 그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했고, 그에게서 받은 문학적 영향 아래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는 이력만으로도 알베르토 망구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또한 “나 같은 독서가에게는 이승의 ‘마지막’ [책] 구입이란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계적인 독서가이자 장서가지요. 이런 그가 『밤의 도서관』에서는 프랑스 시골에 자기만의 도서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공유하며, ‘(낮과) 밤의 도서관’에 대한 사유와 상상을 광대하게 펼쳐냅니다. 그것은 곧 도서관이 개인과 문화의 기억을 담아내는 방식, 또는 지금껏 존재해왔고 지금 어딘가에 존재하며 미래에 생겨날 모든 도서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합니다. 고대의 바벨탑,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 아비 바르부르크의 도서관이나 보르헤스의 개인 도서관, 순례자들이 만든 둔황 모가오 굴 서고, 이동식 ‘당나귀 도서관’, 도서관의 축소판 격인 서재와 백과사전까지…… 그가 다루는 도서관은 종횡을 아우르며 도서관의 모든 정수를 다뤄내듯 실로 다양합니다. 방대한 도서관의 역사와 삽화들을 신화, 공간, 형상, 정신, 상상, 집 등 15개의 장(章)으로 풀어내는데, 영감을 주는 문장과 발상으로 가득합니다. 밤의 도서관이란 무엇인가? 그는 말합니다. “낮 동안에 도서관은 질서의 세계”이나 밤이 되면 “어느덧 나는 유령 같은 존재로 변”하고, “책들이 바야흐로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고, 독자인 나는 희미하게 보이는 문자들의 신비로운 의식을 통해 어떤 책이나 어떤 페이지에 유혹을 받아 끌려들어간다.” 이 책을 분별 있고(이를테면 “영원불멸하며 우주에 신비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도서관”을 꿈꾸지만 모든 도서관이 배타적일 수밖에 없음은 알고 있는), 엄청나게 지적인 책 광인(😅)의 이야기로 읽으면, 저자의 위트가 더 돋보이기도 해요. 가령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면 말이죠. “내 방의 벽에 붙은 책꽂이들이 마치 저절로 채워지는 듯한 모습을, 손에 땀을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밤마다 지켜보던 젊은 시절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만의 도서관을 짓고 싶은 사람에게, 아니 소박하게는 서가 정리나 “책 상자를 푸는 계시적인 행위”를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정리법뿐 아니라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성의 작용과 망상력을 전달해줄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모든 도서관은 자서전적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 도서관이 그 주인의 면면을 반영한다는 사실은 서가에 꽂힌 책들의 제목만이 아니라, 그런 책들에서 연상되는 관계망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경험을 하고, 어떤 기억을 근거로 다른 것을 기억한다. 또 우리는 어떤 책에 영향을 받아 우리만의 책을 장만한다.”―198~199쪽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꼽히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2017년작, 뉴욕 공립도서관을 주인공으로 한 206분짜리 다큐멘터리예요.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인간의 활동은 반드시 맥락 속에 존재하고, 내 영화의 대상이 되는 기관들은 말하자면 그 맥락”이라고 하는데요. 다양한 기관과 공동체에 대한 다큐를 만들면서 내레이션, 음악, 감독의 인터뷰 등을 쓰지 않는 방법론을 고수해왔습니다. 이런 것 없이도 이 영화는 지루할 틈 없이 ‘공립도서관에선 무슨 활동이 벌어지는가, 도서관은 무엇을 하는가.’에 관한 밀도 높고 총체적인 정보와 이미지를 보여주죠. 도서관의 일은 상상 그 이상으로 넓고 깊습니다. 장서 및 아카이브 관리뿐 아니라, 저자 강연(리처드 도킨스, 패티 스미스 등이 등장해요!)이나 토론 모임,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주최하고, 어린이·청소년 또는 소외계층에게 기본 교육 및 직업 교육을 실시하고, 인터넷 접근권을 제공하고, 장애가 있는 시민들에게 도서관 자료 활용법을 알리죠. 한편 운영진, 사서, 교육자, 자원봉사자 들은 운영 원칙, 예산, 효과적인 상호작용을 두고 어떤 논의를 벌이는지, 인쇄물이 어떻게 디지털화되는지, 반납합 책들이 어떻게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거대한 사회이자 세계를 이루고 있는 뉴욕 공립도서관의 면면을 한 편의 문화기술지를 쓰듯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토니 모리슨이 공립도서관을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일컬은 것이나, 마야 안젤루가 “구름 속의 무지개”에 비유한 말이 지나갑니다. “노숙자 방문자 얘기로 넘어가죠. 도서관은 모든 방문객을 돕고 환영할 의무가 있는 곳인데 방문객 간에 긴장감이 흐르기도 해요. 서로 원하는 게 달라서죠. 뭔가 결단이 필요해요. 섞이는 게 싫은 분들도 있는데, 누구나 존중하면서 어떻게 모두 수용하죠? 이 상황에서 도서관의 적절한 역할은 무엇일까요? 누구든 환영하는 공간에 그칠 것이 아니라 노숙자 관련 사회 정책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죠? 뉴욕시나 이미 이 문제를 다루는 다른 전문 기관에만 의존하는 걸 넘어서요.”―운영진 회의에서 “사람들에게 자립의 기회 혹은 다른 삶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도서관은 진정한 의미의 복지 기관입니다. 소란을 피운다고 쫓아내기만 할 일이 아니죠.”―『도서관 산책자』, 56쪽. 세 시간이 훌쩍 넘게 제 눈과 귀를 붙들었던 요소 중 하나는 리액션 숏이었어요. 대화, 발표, 토론, 회의, 연설이 이뤄지는 동안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책과 모니터를 보는 사람들의 존재. 말 없는 독자·청중·관객을 한 명씩 또는 군중으로 비추는 장면들. 그것이 제가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이었고, 거기에 도서관의 존재 이유가 있었고, 공간의 사회적 관계나 도서관의 역사와 역할, 미래가 있었고, 이 영화의 리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당장 책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더 좋은 도서관이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 아닐까요? “지역사회를 위한 이런 프로그램 덕분에 모여서 얘기도 나눌 수 있어요. 다 발전을 위해서죠. …… 작은 걸음이 모여 발전의 길로 가는 거죠. 그래서 다들 얘기하러 오셨는데, 십 대 5명이 밖에 있더군요. 전 들어와서 무하마드의 얘길 들어보라고 했죠. 컴퓨터만 들여다봐도 상관없어요. 들을 수 있잖아요.”―뉴욕 공립도서관의 할렘 머콤스브리지 분관에서 20년 가까이 중동 지역을 취재해온 프랑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2015년 SNS에서 내전 중인 시리아의 다라야에 만들어진 지하 도서관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아랍의 봄’ 당시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독재정권으로부터 폭력적인 진압을 겪고, 봉쇄 조치와 폭격을 겪고 있는 도시. 외부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에서 도서관을 짓고 지켜온 청년들의 이야기에 매료된 저자는, 20대 아흐마드를 중심으로 2년여간 스카이프, 스냅챗 등으로 이어간 대화에 기반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의약품은커녕 식량도 부족한 상황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은 다라야 청년들은 도시의 폐허에서 1만 권이 넘는 책을 수집해 비밀 도서관을 짓습니다. 많은 청년, 어린이, 여성, 노인 들이 책 읽기에 몰두하고, 정부군의 드럼통 폭탄이 매일 떨어져도 규칙을 지켜 대출과 반납을 하고, 도서관을 관리해나갑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다라야의 시민들이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등의 자기계발서를 전혀 다른 용법으로 사용했다는 점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공을 말하는 책에서 그들은 종교나 독재정치가 알려주지 않았던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또 사라예보 포위전을 다룬 역사서의 구절이나 팔레스타인 시인의 시가 그들에게 어떻게 버텨낼 힘을 전해주는지는 놀랍고도 안타까웠습니다. '도서관 산책자'가 “책을 담는 도서관은 시간에 대응하는 물리적 용기”라고 말했듯, 아흐마드는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수단이자 영원히 무지를 몰아내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처럼 탄압, 쿠데타, 고문 등의 소식이 이어지는 때, 고통받는 시민들을 지지하는, 다른 결의 활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입니다.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도서관은 국경이 없는 영토였다. 일렬로 줄지어 선 대륙이었다. 그 어떤 특혜나 방탄복 없이도 책을 유통할 수 있는 비밀의 은신처였다. 공격이 미치지 못하는 이 장소에서 이들은 아늑함을 느낄 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정신도 함양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견뎌낼 힘이 된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사는 정신이다.“―「도서관 규칙」 |
책과 책을 잇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