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총괄한 선배는 감히 전화를 걸어 말도 꺼내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캐릭터였다. 이전 같았으면 동료들이나 몇 불러 모아놓고 선배 흉이나 보며 고충을 토로하는 정도로 아마 끝냈을 것이다. 원치 않았으나 힘이 없어 불의를 막지 못한 불운한 기자의 포즈를 취하며 술이나 마셔댔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결의와 충정이 끓어오른 걸까.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호르몬 교란기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새끼 낳은 짐승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지. 내가 이런 기사나 쓰려고 우는 새끼 떼어놓고 나와 이 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아? 의분이 치솟으면서 회사, 까짓것 그만두면 된다, 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로 순식간에 전이됐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러나 결연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기사가 너무 편파적이에요. 이렇게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말이 너무 대차게 술술 나와 내가 먼저 놀랐다. 그는 ‘어쭈, 이것 봐라.’ 하는 눈치였다.
“뭐? 어쩌라고?”
“제가 취재한 노동계 입장을 기사에 공평하게 반영해주세요.”
어처구니없어하는, 그의 혀 차는 소리가 수화기 건너로 들려왔다.
“안 해주면 어쩔 건데?”
“기사에서 제 이름 빼주세요. 그런 기사에 제 이름 못 나갑니다.”
편집국의 애완견인 줄 알았던 후배가 이렇게 나오자 아마 그는 당황한 것 같았다. 잠시 후에 다시 얘기하자며 전화를 거칠게 끊었다. 기사가 고쳐질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이렇게 회사를 그만두겠구나, 생각하며 퇴근하는 차 안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기 생각이 많이 났다. 아기한테 너무 부끄러웠다. 아기를 봐주시는 시어머니한테도 부끄러웠다.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면서 내가 이 일을 하는 의미,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엉엉 울면서 집에 도착했는데, 그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사 고친 거 봤냐?”
“아직 못 봤습니다.”
“한번 봐라.”
찰칵. 전화가 끊겼다.
컴퓨터를 켜고 기사집배신(기사를 작성하고 송고하는 시스템)에 접속하니, 내가 처음 썼던 것과 비슷하게 기사가 복구돼 있었다. 내 의견이 관철된 것이다.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마음에 드냐?”
“네.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알았다.”
또 찰칵.
일은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되었고, 그날 이후 나는 그 이전과는 조금 다른 기자가 되었다. 작디작은, 일화라기에도 민망한 소소한 일화이지만, 이것이 내게는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자 분기점으로 남아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옳은 것을 주장하면 옳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자기효능감을 부끄럽지만 그날 처음 맛봤다. 그 선배 역시 자기 발로 걸어들어와 기자가 된 사람이었다. 우리 모두는 사실 알고 보면 조금씩은 우직한 데가 있는, 순정파인 구석이 있는 인간들인 것이다. 삐딱선을 타다가도 ‘어어어, 여기가 어디지?’ 하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후닥닥 제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날 이후 노동에 대한 나의 가치체계가 바뀌었다. 이것은 내가 그토록 품에 안고 싶은 아기를 떼어놓고 울려가면서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그 물음이 판단의 최종심급이 되어 매번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수많은 이유와 명분 중에서 내게는 아기의 존재가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했다. 이것은 아기가 장차 살아갈 세상에 부끄러운 짓 아닌가, 스스로 매번 물었다. 그러다 보니 비로소 기자 비슷한 그 무엇에나마 근접하게 되었다. 세상에나. 제 발로 걸어들어간 곳에서 제대로 일을 해내기까지 그 오랜 시일이 걸리다니. 스스로 그곳에 갔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니. 그러고 보면 부끄러움이란 이 간악한 인간종에게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훌륭한 교사란 말인가. 우리를 우직하게 그 자리에 다시 서 있게 만드는 척추기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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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관악구청 앞 사거리에서 허리가 다 꼬부라진 할머니가 빨간불이 들어오도록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못 넘어오는 걸 본 일이 있다. 그때 20대 후반으로 보이던 날씬한 남자 경찰이 호루라기와 손짓으로 교통을 통제하더니 뚜벅뚜벅 도로 한복판으로 걸어가 할머니 손을 잡고 건널목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8차로의 모든 차들이 멈춘 그 텅 빈 횡단보도에서 마치 웨딩마치라도 하듯 할머니를 이끄는 그의 살짝 비틀린 옆 걸음.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이것이 바로 공권력이다! 오, 아름다워라! 나는 그 경찰에게 한눈에 홀딱 반했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은 바로 저것이었다. 나는 인도에 우뚝 선 채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으로 뜨듯한 기운이 번지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기요, 저랑 사귀실래요?”라고 말할 뻔했는데, 아이구머니나, 그때 내가 우리 둘째를 업고 있었네.
미학의 정점에는 윤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윤리적이지 못한 존재들이 그래도 윤리적이고자 온 힘을 쥐어짤 때, 부끄럽기 싫어서, 차마 부끄러울 수 없어서, 눈 질끈 감고 옳은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어떤 숭고의 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누가 보든 말든(봐주면 더 보람차겠지만) 내게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이익이 되면 더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을 우직하게 하는 사람들, 하기로 약속한 일은 어쨌든 끝내 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보상도 없다. 그 일을 우직하게 계속하고 있을 유인이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태생이 우직하므로 그렇게 우직하게 일생을 산다. 그들은 승리하지 못한다. 보상도 없이, 보람도 없이, 패배감 속에서, 그렇지만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그렇게 산다. 나는 우직하고 싶지만 마냥 우직하기엔 약아빠진 인간이라서, 언젠가는 흉내 내는 이 짓마저도 때려치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라서, 이런 사람들을 목격하게 될 때면 울면서 달려가 부둥켜안고만 싶다. 당신들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내가 가진 것이 없네요.
이보시오, 경찰 양반. 그때 당신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내 마음이 다 설렜소. 아마 댁이 큰돈을 벌거나 큰 영화를 누리기는 힘들 것이오. 그러나 크게 궁핍하지도 곤궁하지도 않기를, 대개는 안온하고 화평하기를 내가 바라오. 살기가 힘들어 잠시 휘어지더라도 금세 되돌아오기를, 되돌아와 부끄러움으로 더 좋은 경찰이 되기를, 보람으로 갈비뼈가 뻐근한 날들이 많기를 멀리서 내가 바라오.(타령조를 용서하시오. 둘째 업고 숭한 마음 품은 것이 미안해서 그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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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세련되고자 온 생애를 분투했는데, 결국 끌어안고 만 것은 순정, 우직, 신의, 성실, 권선징악, 인과응보 같은 촌스럽기 그지없는 것들뿐이다. 타령조로 판소리 다섯 마당 같은 소리나 읊어대고 있는 나는 장차 어느 방면으로 나가든 솔직히 글러먹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