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직했던 순간들 ②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욕망의 지도를 따라서 인생을 살아간다. 내 삶은 지금까지 축적해온 내 선택들의 총합이다. 나는 아마 인생을 다시 살아도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 것이다. 내 욕망의 나침반이 결국 같은 지도를 그리게 만들 테니 말이다. 욕망의 지번이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가 지속되지 못한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온통 나 같은 사람들이다. 끝내 순정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 아무리 날렵한 지성과 세련된 유머를 구사해도 알고 보면 우직하기 그지없는 사람들. 촌스러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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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동문학의 대부 닥터 수스가 쓴 『코끼리 호튼이 알을 품어요Horton Hatches the Egg』를 아이가 도서관에서 빌려왔길래 읽어주다가 그만 목이 메고 말았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 이루고 싶었던 꿈이 거기에 있었다. 동화는 게으름뱅이 어미새 메이지에게 속아 꼼짝 못 하고 새알을 대신 품게 된 코끼리 호튼의 이야기다. 다리 사이에 알을 끼우고 온종일 앉아 있는 게 못 견디게 힘들고 지루해진 메이지는 신나게 놀러다닐 수 있는 자유를 갈망하고, 때마침 나무 앞을 지나가던 코끼리 호튼에게 잠시만 대신 알을 품어달라고 부탁한다. 호튼은 조심조심 새 둥지에 올라가 알을 품고, 이내 알에는 온기가 번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메이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낮이 지나고 밤이 오고 다시 낮이 지나도, 한여름의 소낙비와 천둥 번개가 내리쳐도 오지 않는다. 비바람에 부들부들 떨면서 호튼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팜비치에 누워 일광욕 중인 메이지는 전혀 돌아올 생각이 없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여름의 곤란과 가을의 고충과 겨울의 혹독을 호튼은 알을 품은 채 고스란히 견뎌낸다. 꽁꽁 얼어 얼음동상처럼 되었어도 한겨울의 호튼은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왜냐면, 약속했으니까. 메이지가 돌아올 때까지 알을 품고 있겠다고, 비록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길어지고 있긴 하지만, 약속을 했으니까. 재미도 없고,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까.
“나는 말한 건 꼭 지켜. 그리고 꼭 지킬 것만 말하지. 코끼리는 충직해. 100퍼센트 충직해.”
장면마다 반복되는 코끼리 호튼의 독백이다.
다시 온 봄을 즐기러 나온 동물 친구들이 놀려대도, 심지어 사냥꾼들이 총을 겨눠도 코끼리는 꿈쩍하지 않는다. 절대로 알을 떠나지 않는 진기한 코끼리는 둥지째 서커스단으로 팔려가고, 새알을 품는 코끼리의 서커스 쇼는 성황리에 전국을 순회한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엄마 새 메이지가 쇼를 보러 서커스단의 텐트 안으로 쑤욱 들어와 코끼리 호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호튼의 얼굴엔 놀람과 공포가 스치고, 알 속에선 아기 새가 부화하기 시작한다.
“내 알! 내 알이 부화하고 있어!”
코끼리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치자, 엄마 새 메이지는 날카롭게 응수한다. “내 알이거든!” 힘든 노동의 시간은 모두 끝났다. 메이지는 이제 알을 돌려받고 싶다. “이건 내 알이야. 넌 내 알을 훔쳤어. 내 둥지에서 꺼져, 내 나무에서도 꺼져!” 그렇지. 이것은 메이지의 알이고, 메이지의 둥지이며, 메이지의 나무지. 불쌍한 호튼은 슬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물러선다. 그때 펑, 하고 아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데…… 여기서 나는 그만 울먹이고 말았다.
“코끼리새다!”
알을 깨고 나온 아기 새는 코끼리 호튼을 꼭 닮은 긴 코에 큰 귀, 꼬리까지, 날개만 있다 뿐이지 영락없는 아기 코끼리였다. 서커스의 관중들은 환호하며 소리쳤다.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반드시 그래야지! 왜냐면 코끼리 호튼은 충직하니까! 그는 알 위에 앉아 있고 또 앉아 있었어! 호튼은 말한 것은 지키고, 지킬 것만 말하니까…….” 코끼리와 코끼리새는 꼭 닮은 얼굴로 행복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서커스단은 이들을 행복한 마음으로 풀어준다. 아기 새는 메이지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아기 새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보라가 치나 자신을 꼭 품어준 우직한 코끼리 호튼을 닮았다. 그들은 자신을 꼭 닮은 서로를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행복하다.
20대 시절 문학 강의실에서 그토록 촌스럽다고 규탄됐던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중년의 어른이 나는 되어버렸다. 리얼리즘이고 모더니즘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이고 다다이즘이고 간에 이제 나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좋다. 소망 충족의 서사가 좋다. 선善에 대한 보상을 원한다. 이 세상 어디서도 보상받지 못하는 선을 위해 이야기로 인심 좀 쓰면 어디가 어떻단 말인가. 권선징악의 결말은 읽는 이를 고무시킨다. 현실 세계 어느 구석을 둘러보아도 권선징악은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까. 리얼리티가 어떻고, 열린 결말이 어떻고, 이런 건 그나마 세상살이가 어지간할 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나만 혼자 이 책에 감동받은 것인가 궁금해 찾아본 서평 사이트 리뷰에는 호평들이 즐비했다. “내 평생 가장 잊을 수 없는 동화책.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내 인생을 이끈 책. 아직도 호튼의 대사들을 종종 인용하곤 한다.” “아동문학의 성서. 내 어린 시절 수도 없이 읽었고, 이제 어른이 된 내 딸에게도 수도 없이 읽어준 책. 모두가 호튼을 흉내 내며 자란다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게 분명하다.” “내 인생 최고의 슈퍼 히어로, 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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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커리어의 초반 몇 년간 나는 형편없는 기자였다.(나중이라고 형편이 썩 괜찮아진 것은 아니지만.) 내 발로 공동체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며 걸어들어왔지만 나는 업계의 관행과 조직의 논리에 완벽하게 순응하는, 회사의 상사와 선배들 눈에 드는 것에만 급급한 영악하고 잔망스런 초년병 기자였다. 거지 같은 기사를 쓰라고 지시를 받으면 예쁘게 꾸며서 조금이나마 덜 거지처럼 보이도록 최선을 다해 재빠르게 납품했고—그렇다고 거지 같지 않을 리 없다—, 부당한 지시가 내려오면 관행이 그런 것이지, 라고 스스로 납득하며 충실하게 지시를 이행했다. 빠릿빠릿하게 매끈매끈하게 시키는 모든 것을 군말 없이 해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나니 윗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어여쁘고 유능한 조직의 꼬마 병기가 되어 있었다. 딴에는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경찰기자 시절이었다. 보육원 어린이들이 전두환 이순자 부부에게 세배하고 받은 세뱃돈을 기부했다는 통신사 기사를 받아쓰라길래 충실한 보강취재와 깔끔한 문장으로 이쁘게 단장해 ‘미담기사’로 납품한 적이 있는데, 그날 오후 지금은 세상에 없는 존경하던 선배가 전화를 걸어와 내게 마구 화를 냈다. 너는 생각이 있는 애냐, 없는 애냐고. 전두환 같은 살인마한테 애들 세배를 시킨 보육원을 조져야지 그걸 미담기사랍시고 쓰고 있냐고. 나는 귀 끝까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웠다. 나는 생각이 없는 애였다. 이제는 회사에 없는, 조금도 존경하지 않았던 당시 데스크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를 킬†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끌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을 때, 그가 대답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기사는 나갔다.
(† 기자가 발제하는 기사 아이템 중 뉴스 가치가 낮거나 보도가 적절치 않아 채택하지 않는 아이템을 일컫는 언론계 은어.)
그저 사랑받고 싶어서, 조직의 권력자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 형편없는 기자질을 멈추지 못하던 내가 코끼리 호튼처럼 우직한 마음의 부스러기 같은 것이나마 품을 수 있게 된 것은 첫아기를 낳고 나서였다. 출산휴가 후 복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노동쟁의가 한창이던 시절 노동 담당으로 복직했는데, 내가 온종일 취재한 노동계의 절실한 목소리가 기사 맨 마지막에 “한편 노동계는 이에 대해 총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단 한 문장으로만 반영된 걸 초판 신문을 보고 알았다. 1면에 실린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쟁의로 인한 연간 조업일수 손실과 손실액, 한국 경제에 끼치는 악영향으로만 도배가 돼 있었고, 그 기사 밑에 내 이름이 달려 있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