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직했던 순간들 ①
스무 살 때였다. 내 인생엔 대체로 그런 일이 없는데, 예외적으로다가 딱 한 번, 키가 크고 몸이 좋은 데다 얼굴까지 잘생긴 경영대 남학생의 구애를 받은 일이 있다. 이게 웬 떡이냐. 어, 이거이거, 내 인생에도 이제 볕 드나, 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며칠 만나보니 딱 싫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타입, 야. 심. 가. 눈에서 야망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게 드라마 「청춘의 덫」에 나왔던 이종원을 방불케 하는 인물이었다. 입만 벌리면 부와 출세, 성공의 사다리 저 꼭대기를 향한 청운의 꿈을 읊어대는데, 뭐 어쩌라고, 싶은 비뚤어진 마음만 들면서, 세상에 그 잘생긴 애를 내가 차버렸지 뭐야?(얘, 잘 지내고 있니? 그래, 지금은 사다리 몇째 칸까지 올라가 있니?)
연애나 사랑 같은 건 한 인간의 욕망구조를 가장 적나라하게 투시하는 엑스레이라서, 이 일화는 나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된 결정적 모멘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오로지 저만 아는 자에 대한 경멸 같은 것이 내겐 있구나. 세계가 좁은 자들에 대한 멸시가 있구나. 사춘기 시절 친구들끼리 모여 서로의 이상형을 털어놓던 자리에서 나는 당시 절찬리에 방영됐던 대하드라마의 독립투사를 언급했다가 산 채로 아스팔트 밑에 묻힐 뻔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그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독립운동하러 만주인가 어디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가난한 초가집 호롱불 앞에 앉아 “서방님, 여기 걱정은 마시고 거사에만 전념하시어요.”라고 말하는 아내 역할의 배우에게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장차 저기 앉아 저 대사를 치는 여인이 되고 말리라! 조국의 명운을 구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멋진 운동권 오빠, 그 오빠의 뒷바라지를 하는 듬직한 여친이 되겠어! 지금이야 “그깟 독립운동 내가 한다 인마.” 같은 대사가 적격인 강철부인이 되었지만, 어쨌든 돌이켜보면 이것이 내 욕망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열정적 사익추구자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내 협애한 마음의 장벽. 물론 돈 좋다. 엄청 좋다. 그렇지만 가장 좋지는 않다. 돈이 가장 좋은 사람은 나랑 안 된다. 돈은 아무리 좋아봐야 두 번째로 좋아야 하는 것이다. 당장 생존을 도모할 방도가 없을 때가 아니고서야 돈이 가장 좋을 수는 없다.
겸허하게 인정한다. 내게는 윤리적 허영이 있다. 그걸 인정할 만큼은 내가 양심적이다. 윤리도 욕망이고, 그 욕망이 때로는 물욕이나 출세욕, 성욕보다도 강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궁핍한 마음의 소산이며, 그저 럭셔리 브랜드의 가방과 의류로 몸을 두르고 싶은 욕망과 근원적으로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올바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녕 올바른 사람이고 싶은 것이라고 스스로는 믿고 있지만, 그것을 자꾸 현시하려는 나의 욕망은 나조차도 진의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어쨌든 윤리도 욕망이다. 욕망과 윤리는 상호 대립항으로 이해되지만, 윤리 혹은 윤리적 허영이 욕망의 사다리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욕망도 있는 것이다.
직업의 세계들을 탐방—세계가 빈곤해 탐방이랄 것도 없었지만—하던 어린 시절, 그렇게 없이 살던 때인데도 이상하게 공적 영역 바깥으론 눈이 안 갔다. 가족과 친인척 모두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빠듯한 도시 변두리의 영세 자영업자들이라 그랬을까. 실제로는 본 적 없는 공적 영역 사람들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공익, 보다 거창하게는 공공선에 복무한다는 자긍심, 그걸 갖고 싶었다. 작고 미약하나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싶다는 환상. 그래서 내 발로 언론계라는 곳에 걸어들어갔다. 매달 26일이면 월급명세서를 들여다보며 폭음을 하면서도 오랜 시간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던 건 모두 이런 자기환상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게 말했지. “야, 그 돈 벌려고 하루 종일 나가 있느니, 집에서 애나 키우는 게 남는 장사겠다!” 엄마는 진짜! 내가 지금, 어, 공동체의 빛과 소금이 될라 그러는데, 어!
물론 이제는 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라는 것이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라는 걸. 공적 영역의 무수한 사기꾼들과 사적 영역의 빅 히어로들도 수두룩이 보았다.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충분히 공공선에 복무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린 마음의 편견 따위 이제는 없다. 그러나 다시 백수건달의 자리로 돌아와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은 원점이다. 돈 되는 일에는 영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이, 어린 마음의 편견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다. 돈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하고 싶은 일은 온통 돈 안 되는 일들뿐이라니. 왜 나란 존재는 이렇게 생겨먹은 것인가!
무라카미 하루키 산문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그가 출판계 사람들에 대해 가진 깊은 신뢰와 애정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기자들 중에 기레기가 없지 않은 것처럼, 출판계라고 해서 양식 있고 선량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출판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잇속만 밝은 약아빠진 편집자들도 여럿 보았고, 그런 이들이 승승장구하면서 판을 흐려놓는 것도 종종 목격했다. 돈 벌어다주는 작가에게만 굽신굽신하며 기자들 상대로 농간을 부리는 편집자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렇지만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어떤 사람이 출판 일을 한다고 하면 기본적으로는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아이고, 그 어려운 공부 해가지고서 박봉의 출판계로, 무슨 납치, 유괴를 당한 것도 아니고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니, 이거 존경의 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생각이 무슨 동작감지 센서가 작동하듯이 절로 드는 것이다.
하루키의 말마따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이런 사람들은 책을 돈보다 좋아하니까 출판계로 오는 것이다. 가장 상업적이라는 미국 출판계에서도 그렇다. 월스트리트로 가든지 유수의 광고 에이전시가 즐비한 매디슨가로 갈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 이곳엔 별로 돈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저버리지 못해 제 발로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돈 되는 작가가 매번 더 사랑스러운 것과 별개로, 그의 마음속에는 책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좋은 작품을 찾아낼 때면 솟구치는 흡사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희열 같은 것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순정純情. 아마도 그것은 순정일 것이다. 세파에 시달리고 때로는 이재에 눈이 멀어 휘어졌을지언정, 순정은 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척추기립근이다. 애초에 이 바닥으로 자진해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당신 안에 순정의 분말이나마 존재한다는 뜻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월스트리트로 가고, 어떤 사람들은 출판계로 갈까. 월스트리트로 간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곳에도 공동체에 크게 이바지하는 빅 히어로는 존재하니까. 다만 어디에 더욱 끌리냐고 묻는다면 나는 월스트리트보다는 출판계인, 아직도 우직한 순정에 마음이 끌리는 그런 촌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큰애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 가깝게 지내던 아이 친구의 엄마가 경찰이었다. 사기 배임 횡령 같은 경제사범들을 다루는 경제팀 소속 경찰이었는데, 성격 화통한 것이 나랑 잘 맞았다. 그가 어느 날 말했다. 지인에게 200만 원인가 사기를 당했다며 몇 달째 매일 찾아오는 할머니가 한 분 있는데, 업무에 방해가 돼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 돈은 찾을 방법이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할머니는 경찰이 왜 그걸 못 찾느냐며 찾아와 닦달을 하고, 그는 언젠가부터 그 할머니에게 친절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보니까 내가 아주 구악 경찰이더라고요. 그냥 딱 구악이야. 민원인 면박 주고, 뭐라고 말을 해도 들어주지도 않고. 아주 투캅스가 따로 없어.” 그러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에 경찰 되겠다고 이 바닥에 들어왔을 땐,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좋은 경찰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말없이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나도 그 마음을 안다. 누가 이 일 안하면 벌을 내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내 발로 걸어들어와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을까, 스스로가 미워지는 순간들. 일은 많고, 힘은 달리고, 그렇다고 억만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는 새끼들이 악악거리고. 보람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그런 순간들.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런 자신이 미워 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걸. 완전히 처음으로는 아니더라도, 몇 걸음 정도는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걸. 그렇게 몇 걸음씩 되돌아 걷다 보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될 수가 없다는 걸. 나는 그가 경찰이라는 사실이 좋았고, 경찰이 되고 싶었던 스물몇 살의 어떤 아가씨를 떠올릴 때마다 더더욱 그가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