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고 싶은 동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책타래 구독자들에게 자기 소개를 해주세요.
추혜인 제 별명은 무영이고,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주민들의 손으로 운영하는 민주적인 의료기관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주변에 마땅히 그런 곳이 없어서 살림을 만들었습니다.
유여원 제 별명은 어라이고요. “어라?” 하고 놀랄 때의 그 ‘어라’입니다. 항상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살고 싶어서 그런 별명을 붙였던 것 같아요. 저는 대학생 때부터 여성주의 활동이 너무 재미있고 계속하고 싶었어요. 여성주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여성주의가 흘러넘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무영이 여성주의 병원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여성주의가 흐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가자고요. 그 꾐에 지금까지 발목 잡혀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풋살입니다.
고양이 참석자도 계신데, 대신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추혜인 몽실이라고 합니다. 스무 살이에요. 2010년 3월 1일쯤 저희가 서울시 은평구로 이사 왔는데, 3월 10일부터 함께 살고 있어요. 9일을 빼고 저희와 은평구 생활을 같이한 고양이입니다.
그렇게나 오래 함께했다면 몽실 님도 살림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유여원 저희가 집에서 회의를 자주하는데요, 몽실이가 어깨 너머로 참석한 회의만 해도 100번은 넘을 거예요.
추혜인 심지어 회의에 열심히 참여해요. 인터뷰도 한 적이 있어요. 실은 제가 몽실이 이름을 빌려서 한 거지만요. 몽실이라고 하면 누구네 집 고양이인지 아니까 ‘은실이’라는 가명으로 했습니다.
살림의 시작부터 함께한 세 분과 함께 인터뷰를 하게 되었네요. 살림은 2012년 창립된 의료협동조합입니다. 하지만 ‘의료협동조합’이라는 개념에 익숙치 않은 분들이 꽤 계실 것 같아요. 의료협동조합이 무엇인지 그리고 살림이 어떤 곳인지 소개해주세요.
유여원 의료협동조합은 낯설어도 협동조합에 대해 들어본 분들은 요즘은 늘어나는 것 같아요. 협동조합은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여럿이 힘을 모아 해결하는 조직체예요. 저희 살림은 의료협동조합으로서 의료나 복지, 돌봄에 관한 공동체원의 필요를 협동으로 해결하는 활동을 합니다. 한국에 있는 서른 개의 의료협동조합 중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가장 먼저 생긴 곳인데요. 협동조합마다 건강관, 지향하는 가치가 조금씩은 달라요. 살림은 여성주의적인 건강관과 문화를 지향하며 서로를 돌보는 협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또는 ‘건강’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 막연히 좋은 것 같다고는 느끼지만, ‘여성주의적 건강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감이 안 잡히는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주의적 건강관은 어떤 건가요?
추혜인 우선 의사와 환자 사이에 권력관계가 있다는 전제부터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이런 위계를 어떻게 더 평등한 방향으로 바꿔나갈 수 있을까, 다르게 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까를 의사로서 계속 고민해왔습니다. 지식의 측면에서 완전히 평등해지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럼에도 의사는 전문적인 조언자로서 환자가 자기 몸에 대해 지니는 주체성을 충분히 존중할 수 있다고 봐요. 부권(父權)적이지 않은 의사-환자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고요.
살림은 ‘평등할수록 건강하다’는 가치관을 지향합니다. 차별과 혐오가 우리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인지하고 그 악영향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의료가 바로 ‘여성주의적 건강관’에 기반한 의료예요. 최근에는 기후 위기를 맞닥뜨리고 팬데믹을 거치며, 의료가 전문화되고 고도화되며 쓰이는 많은 자원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정 없이 자원을 쏟아붓지 않으면서 기후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의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하고요. 이 역시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에서 답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자원의 집중과 배분을 주민들과 협동하고 협의해서 결정해나가는 거죠.
말씀을 들으며 책에도 담긴 사례들이 떠올랐어요. 새로운 약의 도입을 주민들과 의료진이 함께 결정한다거나, 의료기관을 찾은 모두가 안심하고 화장실을 이용하게끔 조합원들이 협의해 성중립 화장실을 만드는 이야기들이요. 저는 늘 환자라는 정체성으로 의료기관에 방문했기에 스스로 의료를 ‘받는’ 사람으로만 여겨왔는데요. 책을 읽으며 내가 의료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실제로 살림에 참여하며 의료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사례가 있나요?
추혜인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됐다는 분들이 있어요. 이건 살림의 진료 방식 때문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 어떤 증상이 나타나면 그 증상에 따라 약을 쓰는 게 당연하다고들 생각해요. 하지만 그 증상이 먼저 먹던 다른 약의 부작용일 수도 있죠. 그러니 기존에 복용하는 약을 검토하고 의심이 되는 약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진료를 해요. 이런 경험을 하며 환자들 또한 자신의 증상과 상태에 관해 의료진에게 더 잘 공유합니다. 진료를 받기 전에 의료진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더 잘 준비해 오시고요.
유여원 살림은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환자로서 오시는 경우가 많아요.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환자로서 만족스럽고 사려 깊은 진료를 받다 보니 조합원이 되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 과정에서 좋은 진료를 받는 게 다가 아니고 건강한 관계로 함께 건강해질 필요를 느끼는 분들도 있어요. 건강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함께하기도 하고요. 속도 차이는 있지만 의료에서 시작해서 건강, 돌봄을 향해가는 과정 중에 다들 계신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원고를 집필하기 전, 선생님들을 만나뵈었을 때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살림의 돌봄 3 원칙인) 자기돌봄, 서로돌봄, 함께돌봄은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조직 차원에서 행하는 돌봄인) 함께돌봄에 휘말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돌봄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돌봄이 개인의 선의에만 의존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조직 차원에서도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었는데요.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추혜인 살림은 비혼 여성들의 모임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는데요. 아닌 경우도 있지만 비혼 여성들은 대개 자녀가 없잖아요.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부모를 봉양하는, 이런 관계에 우리가 속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어떤 관계를 구축해야 서로를 돌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있었고요. 서로 돌봄을 주고받지 않아도, 내가 돌봐준 사람이 나를 돌보지 않더라도 돌봄이 순환될 수 있는 관계망을 만드는 게 당시 저희에겐 생존의 문제였던 거죠.
사실 그때는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이런 돌봄이 필요할 거라고까진 생각을 못했어요. 저는 30대고, 어라는 20대였으니까요. 그리고 저희가 비혼 여성 커뮤니티에 가지는 책임감이 있거든요. ‘70대, 80대가 되면 필요해질 테니 그전에 대비해야 해! 이 친구들을 같이 먹여 살려야 해. 같이 보살펴야 해.’ 이런 이유 때문에도 나이 들기 전에 미리 준비 시작한 건데 그 사이에 사회도 많이 바뀐 거예요. 자녀 유무와 상관없이 가족에게 돌봄을 맡기지 않는 사회로 향하고 있어요. ‘인간이라면 어떤 돌봄이 필요한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된 것이죠. 때마침 저희가 먼저 시작한 고민들이 지역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주민들과 함께 돌봄의 공동체를 기획하게 되었어요.
유여원 살림의 자기돌봄은 건강한 식단을 챙겨먹는 행위만 의미한다기보다는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자기가 원하는 돌봄, 자기다운 돌봄을 목표로 하는 돌봄인 거죠. 저는 여전히 자기돌봄이나 가까운 사이에서 주고받는 서로돌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함께돌봄은 협동조합을 했기 때문에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조직을 이뤄 시스템 안에서만 가능한 돌봄이 있고 그게 정말 필요하다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많이 느끼게 되었거든요. 또 그게 가능하다는 걸 협동조합을 운영하며 많이 체감하기도 했고요. 자기돌봄과 서로돌봄을 포함해 체계나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느꼈고, 많은 사람이 모인 살림에서 해나가고 있습니다.
살림을 준비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온 만큼 살림에서 일어난 일들이 워낙 많을 것 같습니다. 책에 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빠져야만 했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유여원 100개, 1000개 있죠.
추혜인 에피소드보다도 살림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져서 아쉬워요. 맡은 일을 꾸준히 칙칙폭폭 하고 계시는, 법인운영부의 문현주 부장님 같은 분들은 쓸 수가 없었어요. 늘 남의 에피소드를 수습하는 분이거든요. 어느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아니라 빠지게 되었는데요, 중요도 순으로 책의 등장인물을 고른 게 전혀 아니라는 점을 꼭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유여원 지금 생각난 것은 지난 토요일의 일이에요. 저희는 ‘월간 살림’이라고 한 달에 한 번씩 조합원이든 지역 주민이든 함께 모여 운동하고 재미있게 노는 모임을 갖는데요. 지난 토요일에도 월간 살림이 열렸어요.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는데 한 60대 조합원 분이 자신은 월간 살림에 오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휴대폰이 고장 났는데, 문득 월간 살림을 한다는 게 떠올랐고 여기 오면 누군가 날 도와주겠지라는 생각에 오셨다고 해요. 그리고 잘 해결하고 가셨어요. 휴대폰을 고치는 건 의료는 아니잖아요. 돌봄일 수는 있겠지만요. 그러니까 살림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곳에 가면 누군가 나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이게 참 재미있더라고요.
추혜인 의원에도 뭐가 안 되고 어디에도 연락을 할 수 없으니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길에서 주운 지갑의 주인을 찾아달라고 의원에 오시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그냥 찾아오는 만만한 곳이구나 싶어요.(웃음)
살림의 대표적인 프로그램, 여성주의학교의 모토는 ‘내 삶을 바꾸는 공부, 세상을 바꾸는 여성주의’입니다. 살림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을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꾸려가며 두 분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합니다.
유여원 식상한 말이지만, 살림을 하며 제 여성주의의 지평이 엄청 넓어졌어요. 제가 20대 때 가지고 있던 여성주의에 대한 관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살림을 거치며 ‘이 사람 여성주의자구나.’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범위가 엄청 넓어졌어요. 예전에는 올바른 여성주의자가 되고 싶어서 애면글면했거든요. 스스로를 덜 떨어진 여성주의자라고 느꼈고요. 근데 나이를 먹으며 활동하다 보니 사는 모습은 다 달라도 모두가 여성주의자일 수도 있겠다고 느껴요. 여성주의라는 말을 모르거나 여성학 이론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너무 멋있는 페미니스트 동네 언니, 아저씨 이런 분들을 만나니까요. 제가 가진 여성주의에 대한 기준이 넓어지고 관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추혜인 쉬운 얘기부터 하자면 저희는 살림을 같이 안 했으면 같이 살고 있진 않을 거예요. 동료로서는 되게 잘 맞지만 같이 생활하는 사람으로서는 성향이 다른 부분이 많아서요.
의사로서는요. 협동조합을 시작할 때도 의료가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머리로 알았던 듯해요. 요즘은 한 사람의 건강을 결정하는 데 의료가 너무나 일부고 다른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진짜로 체감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살림에서 어르신 혼자 사는 집에 방문해 함께 운동하고 인지 재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들을 ‘건강이웃’이라고 하는데요. 건강이웃의 방문을 받은 어르신들의 상태가 실제로 좋아지시는 거예요. 병원에서 약을 처방해봐야 약을 진짜로 드시는지 안 드시는지는 모르거든요. 근데 건강이웃이 직접 집으로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냈잖아요. 진료실에서 5분, 10분씩 몇 년을 봐온 관계들보다 일주일에 한 번 직접 찾아가 함께 몸을 움직이며 보낸 관계가 훨씬 농도도 짙고 시간의 절대량도 많다 보니까, 어르신들의 건강에 영향을 많이 미치더라고요. 이래서 의료협동조합을 하는구나 싶었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떤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으신가요?
유여원 의대생, 간호대생, ……
추혜인 아니요. 제 이전 책인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의료인 후배들이 많이 읽기를 바랐는데요, 이번 책은 집필하며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당연히 후배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지만 의료인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거죠. 저는 동네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보면 좋겠어요.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는 분들이나요. 풀뿌리 운동 대부분이 돌봄을 키워드로 운동을 해나가는 건 맞는데, 돌봄에 멈추지 않고 의료로 뻗어나갈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운동이 확장된다면 더 탄탄한 관계 속에서 주민들을 조직할 수도 있으니까요.
유여원 세상이 너무 나빠서 마음 걸칠 데가 없다, 무섭고 외롭다 이렇게 느끼는 분이 읽으면 좋겠어요. 인간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과 애정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사회가 그걸 앗아가기 때문에 더욱 희망과 애정이 필요한 건데요. 이 책을 읽고 망해가는 세상에도 이런 구석이 있다는 걸 안다면,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희는 기본적으로 되게 조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조직을 만든 거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이 책을 보고 마음이 설레고 다섯 명 열 명이라도 모여서 뭔가 해볼까, 원래 알던 친구들에게 최근에 아팠던 내 경험을 털어놓아볼까,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좋겠네요.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기에 적합한 사람일까 라는 자기 의심이 원고를 쓰는 중에 살짝 들기는 했지만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