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만들기 전 편집자의 필수 업무(?) 중 하나는 바로 ‘모델 도서’를 찾는 겁니다. 내가 만드는 책이 어떤 이들에게 읽힐 것인지 그 예비 독자군을 그려보는 일이지요. 일종의 시장 조사지만, 곧 세상과 만날 이 책의 ‘선배’들을 찾아 일종의 계보를 그린다는 점에서, 제게는 즐거운 일이랍니다.
그래서일까요? 심미섭 작가와의 첫 만남에서 어떤 책이 원고를 쓰는 데 영향을 주었냐고 물었습니다. 도서관 책장 사이를 오가며 닥치는 대로 읽은 후에야 쓰기 시작할 수 있었다는 심미섭 작가는 기꺼이 쓰기의 동반자가 되어 준 책들을 하나하나 일러 주었어요. 이미 닮아 있는, 혹은 닮고 싶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친연성을 띠는 책들을요.
그날 사무실로 돌아가 모델 도서를 정리하며 생각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은 어쩌면 저자와 편집자의 책장을 한데 섞는 일은 아닐까? 원고를 쓰고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참고한,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이 그 계보를 따르고자 혹은 그 옆에 나란히 서고자 하는 책들을 소개합니다.—편집자 myy
“나 자신을 어머니에게 설명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다. 마치 파도를 거슬러 헤엄치는 것처럼.”—207쪽
어떤 책에 영향을 받았냐는 편집부의 질문에 심미섭 작가가 가장 먼저 답한 책입니다. 『펀 홈』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퀴어로서의 성장담을 문학이라는 프레임으로 반추한 앨리슨 벡델은 그 후속작인 『당신 엄마 맞아?』에서 엄마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남편이 게이라는 비밀을 품고 살아온 엄마와 그런 엄마를 치유하려고 했던 유년기, 여기에서 비롯한 상처들에 관해 정신분석학이라는 틀을 끌어와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나 다름없어요. 『당신 엄마 맞아?』는 퀴어라는 정체성과 모녀 관계, 심리 상담 세션 등 진보 정치와 레즈비언 섹스를 경유해 ‘엄마’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책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과 많은 키워드를 공유합니다. 심지어 산전수전을 다 치르고도(남편가 그 주요한 원인)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두 엄마의 ‘냉담한’ 캐릭터마저 꽤나 닮아 있는 듯해요.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과거로부터 ‘치유’를 (그리고 복수도) 꾀하려 한다는 것. 쓰는 입장뿐만 아니라 읽는 입장에서도 이야기의 힘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어요. 그런데 딸로 태어난 작가에게 ‘엄마 말하기’란 일종의 숙명인 것일까요.
“‘작가의 일은 혼란스러운 인생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 자신의 이야기에 복무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가족도, 진실도 아닌 이야기에 복무한다는 점이다.’” —289쪽
“저는 안 건강해진다고요. 제가 게이라서, 항문섹스를 해서, 노콘 안싸를 해서 HIV 양성이 될까 봐가 아니고 저의 기질, 성격 이런 것들의 일부가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그걸 복구하거나 회복할 방법이 없다고 느낀다고요.”—52쪽
왜 레즈비언 섹스 이야기를 썼냐는 편집부의 질문에 심미섭 작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난잡하고 문란한’ 게이 이야기는 세상에 꽤 나와 있지만 그런 레즈비언 이야기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레즈비언 섹스를 부러 다루려 했다고요. 그러면서 예시로 든 책 중 하나가 바로 MSM(Men who have Sex with Men, 남자와 섹스하는 남자) 퀴어 활동가 유성원의 에세이입니다. ‘찜방’에서 사람을 일회성 만남을 가지며, ‘노콘 안싸’를 하는 어느 개인의 기록이 이야기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주류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모범적인 소수자 상에서 벗어나기. 사회적 낙인을 전제하는 자긍심은 거부하기. 이러한 쓰기는 동성애를 문란하고 변태적이라는 규정 짓는 혐오의 언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실천에 가깝습니다. 퀴어 커뮤니티 내부의 규범에 대해 되묻는 나영정 활동가의 해설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잘 드러내는데요. 그 부분을 함께 읽고 싶어요.
“피땀 흘려 세운 나라 동성애로 무너진다는 혐오세력의 우스운 말마따나, ‘피땀 흘려 이룩한’ (국가가 아니라) 정체성의 서사를 이렇게 허물어뜨리다니, 과연 이런 서사‘도’ 자긍심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혐오세력이 멋대로 구성한 ‘문란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며 가정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파괴한다’는 게이의 모습이 진짜 게이의 모습이 아니라고 반대하면서 정말 ‘문란’한 어떤 게이의 삶을 우리 손으로 삭제해왔던 것은 아닌지 질문이 필요하다.”—408쪽
원고의 오류를 찾아 올바르게 고치는 어느 교정공의 일기를 엮은 책입니다. 청년 세대 노동자로 경험한 뻔하디뻔한 노동 현장에서의 부조리가 꾹꾹 담겨 있다는 데에서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분노 대신』과 닮은 책이라고 생각했어요.(이걸 내가 왜 해야 되는데? 왜 이런 헛짓을 해야 하는데?)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분통이 터지는 동시에 깔깔 웃게 하는…….
대충 번역기 한 번 돌린 것을 원고라며 보내는 등의 일이 있으면 교수들끼리 서로 싸우기도 한다.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차라리 다행이고, 대개는 서로에 대해서든 책에 대해서든 큰 관심도 없다. 아니, 다행인 게 맞나? 교수님들이 책에 세세한 관심을 갖는 편이 좋나? 저마다 나서서 이 교수님은 이렇게 해 주세요, 저 교수님은 저렇게 해 주세요, 이러면 내 일이 두 배 세 배가 될 뿐……. 어쨌든 출간일은 정해져 있다. 내가 교수님들과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상사 또는 원청업체의 편집자가 대신 싸워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잠깐, 원청업체라니? 말 그대로 나는 이 일을, 출판 편집을 대행하는 회사에서 하고 있다.—86~87쪽
이 책의 저자 유리관의 ‘바로잡기’는 원고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2024년 4월 총선을 전후해 쓴 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한 줌’ 진보 정당에 속해 있으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열변에서 세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잘 느껴져요. 너무나도 협소해진 진보 정치의 입지를 확인한 지금, 정치의 의미를 골몰하게 되는 대목이에요.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을 읽으며 페미니스트 정치의 자리를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요.
유세를 도우면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당으로 나왔으면 찍어 준다? 그래서 □□당 간 ㅂㅇㅈ 어떻게 됐나? 정책이 안 보인다느니 찍을 사람이 없다느니 싸우기만 한다느니 가능성이 없다느니…… 그런 소리들 다, 있는 그대로 들으면 안 된다. 이대로라면 가능성이 없는 쪽은 이 세계다.—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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