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5
2022년 1월 13일 목요일
간밤 섹스 직전에 ‘S 후보 돌연 일정 중단’이라는 뉴스를 보고, 어떻게든 이미 시작한 섹스는 계속하며 후보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 미국 드라마에서는 직장에 이런 일이 생기면 섹스는 안 하던데…… 솔직히 알 게 뭐냐? 내가 당장 전화해서 후보를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도저히 알 수 없을 테고. 그리고 만화가한테는 대체 이게…… 아무 의미도 없는 뉴스 때문에 하룻밤이 망가질 이유는 없잖아? 내가 그 사람 눈치를 보며 억지로 섹스했다는 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랬을지도. 아무튼 나도 ‘여자 당한’ 여자니까.
(…….)
오늘도 9시 출근. 역시 아무도 없음. 누구도 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음. 우리가 동료라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지. 저기요……. 님 인생만 인생입니까, S 씨? 제 인생도 꽤 중요하거든요. 제가 일하는 공동체에 일어난 일을 뉴스 말고 단체 내에서 전해 듣고 싶거든요. 그러고 나서야 양해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싶거든요. 위원장도 라디오 출연이 취소됐으면 나한테 말해 주었어야지. 무슨 얘기를 할지 자료 조사해서 내보내는 건 전데요. 전 공보국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사람인데요. 언론에 공적인 메시지들을 내보내는 사람이요. 그리고 우린 한 사무실에서 일하잖아. 그래, 정신 없겠지.
와, 벌써 10시고 아무것도 된 게 없네. 누가 왔다.
M: 저도 들은 게 없어요. 위원장도 마찬가지고요. 오전 회의가 급하게 잡혀서 들어갔다 왔어요. 오프 더 레코드지만 지지율 부진을 이유로 당 대표가 사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고는 하는데……
회의인지 중언부언인지를 하는 와중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반은 양복에 반은 개량 한복 차림인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들어온 목적은…… 지도를 사라고? 저 현대의 김정호 선생은 여의도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팔고 있는 건가? 대선 후보가 잠적했는데 기자들이 아니라 지도 할아버지가 들이닥치는구나, 여기는.
다시 M: 지금까지 후보랑 선대위 간 소통이 안 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당 대표는 이제 선대위 말고 비서실 체제로 후보 맘대로 하라고 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빨리 잡코리아 켜. 난 벌써 워크넷 둘러보고 있어.
그렇다! 여기는 누군가의 일터다. 떼돈을 벌려고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월급이 나와야 밥도 사 먹고(식대도 안 주는데 여의도 물가로 점심을 사기가 쉬운 줄 아나.) 월세도 내지. 그런데 대통령 후보가 사라진, 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르는 선거 캠프에서 노동자는 무얼 해야 하는가?
(…….)
D-30
2022년 2월 7일 월요일
지난 2017년 대선 때 페미당당 친구들과 개표 방송을 함께 보며 ‘S 후보 베팅’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의 집에 모여 저녁을 같이 먹거나 조촐한 파티를 열던 시기였다. 메뉴는 뚜껑을 열기 전까지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나베 요리. S의 예상 득표율을 종이에 적어 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내가 가장 먼저 6퍼센트를 적었고, 친구들이 9퍼센트부터 10퍼센트까지를 썼다. 너무 낮게 잡았나 싶어서 얼른 8퍼센트로 고쳐 놓았다. 뉴스에 나온 출구 조사 결과는 5.9퍼센트.
잠깐 탄식한 우리는 침착하게 나베 국물을 떠먹었다. ○○당 당원인 내가 가장 낮은 수치를 예상했는데, 실제 결과는 그만큼도 안 나왔다. 실망하는 친구들을 보니, 내가 현실을 잘 파악했다는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뭐랄까…… 내가 가진 엘리트적 패배 의식만 자각하게 되었다. “내가 당원이라 좀 아는데, 어차피 안 돼.” 학부 시절 운동권이라고 하는 남자 선배들에게서 많이 읽힌 태도였다. “야, 진보에는 미래가 없어.”라거나 “학생 정치 조직은 어차피 망했는데…….”라며 노력하는 이들을 힘 빠지게 만드는 태도. 내부자이고 당사자니까 그렇게 말해도 된다는 비겁한 특권 의식. 나도 그 선배들을 닮아 가고 있는 게 아닐까? “S를 뽑으면 S가 됩니다.”라는 말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구도 S가 지금 당장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며 그에게 투표하지는 않는다. 다만 페미니스트로서, 퀴어로서, 노동자로서 대선에서 내 존재가 지워진다면 살 수 없겠다는 마음, 그 때문에 굳이 웃음거리가 될 사표를 내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다들 S가 좋지만 윤석열이 될까 봐 차마 못 뽑겠다고 한다. 나는 그런 이들을 딱히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직무 유기일까? 두렵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얻어 낸 딱 한 표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하면 어떡해? 연수와 오래간만에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런 걱정을 내비쳤다. 지난 설에 고향 부산에 가서, 이번에는 투표장에 안 나가겠다는 어머니를 “어차피 그럴 거면 그냥 S 뽑아 달라.”라며 설득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그런데 S 때문에 윤석열이 당선되면 어쩌지?” 연수는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나는 지난 대선에 S 후보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무효표 냈을 거야. 이번에도 마찬가지고.”
아! 내가 오만했다. 캠프에서 일하는 중이니,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S를 지지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뉴스를 통해 선거전을 지켜보는 친구들의 마음은 더 절박했구나. 나는 직접 몸이라도 굴리며 답답한 마음을 덜기 위해 선거 캠프에 들어오지 않았나. 뭐라도 하고 있다는 얄팍한 만족감으로 엉망진창인 대선을 어떻게든 인내하며 지켜보는 나와 달리, 그렇게 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얼마나 초조할까. “무효표라고 하면 좀 우습나? 어떤 애들은 ‘정치 혐오’라더라. 그렇지만 여성이고 퀴어인 내가 정치를 혐오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S인걸. 자기 이익에 따라서 말을 애매하게 한다고 정치인들을 싫어하잖아? ‘2030 여성’ 표가 중요하다면서 여자들 편인 척했다가 금방 말 돌리고. 차별금지법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가 동성애는 안 된다고 하고. 내가 무슨 정치인들이랑 썸 타니? 줄 듯 말 듯. 터키 아이스크림 아저씨도 아니고. 근데 S는 한결같잖아. 믿을 수 있고. 이런 사람 없었으면 난 정말 정치 혐오 했을 걸?” 한바탕 연설을 끝낸 연수는 민망한 듯 “뭐, 난 잘 모르지만.” 하고 덧붙였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이런 판국에서도 S를 뽑을 친구들은 절대로 다른 후보에게 대신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기대는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내일 출근하면 더 이상 비겁한 태도로 일하지 말아야겠다. 연수를 택시 태워 보내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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