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도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느끼며 여름을 나다가 지난 9월 7일, 강남역 앞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습니다. “기후가 아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모인 사람들(그리고 비인간동물 동지들)에게서 잔뜩 힘을 받아오기는 했지만, 때로는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너무 막막하게만 느껴져요. 당장에 닥친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기도 하고요.
『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는 두 인류학자가 SF를 읽고 쓴 책이면서,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한 단초를 전하는 책이기도 해요. 이 책의 저자들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그 기울기조차 알아채기 어려운 지금,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해요. SF라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와 인류학이라는 ‘현존하는 이야기’를 통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번 책타래에서는 세상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끄는 책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내가 발 디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세계의 기울기를 인식하고, “우리가 채택한 정치 제도와 상상력에 도전”하도록 돕는 책들을요. 당장은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직면한 막막함 앞에서 쉽게 냉소하지는 않고 싶어요.―편집자 m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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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의 소설 『빼앗긴 자들』에는 ‘아나레스’라는 아나키즘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뭐든 나누고 공유하며 계급과 권력이 없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이지요. 『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에서는 이러한 르 귄의 유토피아 실험을 다루는 동시에, 아나레스 같은 ‘국가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방증하는 인류학의 사례들을 제시해요. 그리고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을 인용해서 인류학의 의의를 설명하지요.
“인류학이 중요한 것은 단지 통념을 깨뜨려서만이 아니다. 인류학은 우리는 왜 처음부터 정부와 감옥과 경찰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묻게 한다. 우리는 왜 정부 아래 감옥과 경찰이 있는 세상에서 살며, 감옥과 경찰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가? 우리 사회는 어쩌다 이토록 많은 이기심, 분노, 사회적 무책임, 유아적 행동을 양산하여 체계적 폭력으로 규칙을 지키게 하지 않으면 함께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13쪽
위 인용구를 읽고는 바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왔습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인류학’?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론을 정립한 한 사람(주로 남자)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고급 이론”과 달리, 아나키즘은 ‘실천’을 위한 “낮은 이론”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인류학은 삶의 “모델과 같은 무엇을 제시”하는 실천적 지식이라는 데에서 아나키즘과 친연성을 지닌다고요. 그리고 아직 조각으로만 존재하는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통해 국가와 시장이 없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한 이론을 제안합니다.
국가가 없이는 개인이 보호받을 수 없을 것으로, 자본주의 외에는 다른 경제 체제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은 실제 사례들을 빌려옴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정치·경제 체제의 의미를 되묻고 그걸 깨뜨릴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가요. ‘아나키스트 인류학’은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끔 돕는 탁월한 도구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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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판타지의 거장 어슐러 K. 르 귄이 1976년부터 10여 년간 쓰고 전한 강연과 에세이, 서평 등을 묶은 책입니다. 문학과 글쓰기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사회, 여행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어요. 『어둠의 왼손』의 젠더 설정에 대한 쓴 글 「젠더(성별)가 필요한가? 다시 쓰기」도 탁월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제 눈길을 글은 「SF와 미래」라는 짧은 글이었어요.
“우리는 미래가 어디 있는지 압니다. 우리 앞, 맞죠? 우리 앞에 있어요. 굉장한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우리는 졸업식을 할 때마다, 선거를 할 때마다 자신만만하게 그 미래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가 어디 있는지 압니다. 우리 뒤, 맞죠? 그래서 과거를 보려면 돌아보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앞으로 가는, 미래로 들어가는 진보가 방해받기에 우리는 돌아보기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250쪽
우리는 미래를 떠올릴 때 지금보다 발전하고 진보한 것으로 으레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발전하고 진보한 미래가 정말로 모두를 위한 것일까요? 어쩌면 거기에서 미끄러지고 누락된 존재들이 있지는 않을까요. 아프고 장애가 있거나 빈곤하고 퀴어인 존재들이 유토피아의 풍경 속에 속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개발이 원래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쫓아냈던 것처럼, ‘미래’라는 약속에는 차별과 배제, 그리고 파괴가 당연하게 포함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가 미래를 다르게 인식한다면 어떨까요? 르 귄은 안데스 산맥에서 케추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등 뒤에, 어깨 너머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해요. 우리는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간다고 혹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케추아 사람들에게 미래는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라는 거죠. 이들의 가르침은 미래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해요.
“우리의 꿈과 발상을 꿈이 아닌 세계와 혼동할 때, 미래가 우리가 소유하는 장소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곤경에 처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소망 충족 사고와 도피주의에 굴복하고, 우리의 SF는 과대망상에 빠져 허구가 아니라 예언이라고 생각하며, (……) 미래를 정복하는 진정한 신봉자들이 나오기에 이릅니다.
SF 작가로서 저는 케추아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가만히 서서 제 앞에 놓인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땅을, 땅 위에 사는 제 동료들을, 그리고 별들을요. ”—25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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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일부를 수정하고 고치기보다는, 우리의 가치관과 신념, 행동을 바꿔야만 극복할 수 있어요.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의 두 저자는 “디자인을 수단으로 활용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깊이 생각하는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사변 디자인)”을 제안해요. 미래를 도달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상상을 도와주는 매개체”로 여기며, 디자인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는 미래를 그려보자는 것이죠.
이 책은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의 다양한 방법론과 그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좁은 의미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미술, 과학기술, 영화, 문학(여기에는 당연히 SF가 포함됩니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디자인의 접근법을 이용해 ‘제안’하는 이유는 바로 대안을 상상하고 모색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지요. 가능성을 그리는 데에 보탬이 된다는 점에서 디자인과 인류학, 그리고 SF는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둠의 디자인은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이거나 염세적인 것이 아니다. 현실을 부정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디자인의 형태에 대한 대조다. 어둠의 디자인은 이상주의, 낙관주의와 더불어 혼란 속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있으며 여기에 디자인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동력으로 한다. 부정적인 것이나 경고성 이야기, 풍자는 관람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면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는 아늑한 현실 안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어둠의 디자인은 관점의 변화를 촉발하고 아직 생각해보지 않은 가능성에 눈 뜨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69~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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