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현
작년 겨울,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의 방영과 함께 잠시 고려 황실 가계도가 화제가 되었다. 드라마 초반에 나오는 고려의 목종은 네 명의 증조할아버지가 모두 왕건이며, 현종은 왕건의 아들과 왕건의 손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이 가계도는 대체로 ‘막장 족보’, ‘막 나가는 근친혼’이라며 웃음의 소재가 됐다.
내 경우, 이 계보도에서 눈길이 간 부분은 조금 달랐다. 첫째, 왕건의 아들과 딸이 서로 혼인한 경우는 오직 ‘어머니가 다를 때’였다. 즉 어머니가 같을 때만 근친으로 쳤다는 뜻이다. 둘째, 왕건의 딸들은 아버지의 성인 왕씨가 아니라 모친의 성을 따르되, 할머니가 키운 경우에는 할머니의 성을 따르기도 했다.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황후(천추태후)가 그 예로, 아버지는 왕씨이고 어머니는 유씨였지만 황보씨를 이었다.
이는 모계로도 재산과 권력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이고, 고려 사회가 부계제가 아니라 양변제(Bilateral, 아버지 쪽이나 어머니 쪽 친척들 중 어느 한쪽에 우선권을 두지 않으며,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부계나 모계 친족집단을 형성하지 않는다.)였거나, 공계제(Cognatic, 부계의 친족집단과 모계의 친족집단 모두에 소속되며, 어느 친족집단에 일차적으로 소속되는지는 다른 기준에 의해 정해진다. 사모아 사회가 특히 좋은 예로, 지금도 가족 구성원이 다른 가족에게 이동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였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일부의 믿음과 달리 한반도에서 가족의 이름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고, 모든 권한이 아버지에게 집중되는 부계제-가부장제가 영원토록 당연한 질서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가족과 친족 제도에 대해 인류학이 가지고 있는 기본 지식이기도 하다. 가족의 방식에 한 가지 ‘옳음’은 없으며, 인류의 제도는 여러 가지이고, 제각각의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있다.
감히 말하는데, 이 사실을 알기 전과 알기 후에 한반도의 과거 사회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천추태후가 애인과 낳은 아들을 다음 후계로 올리려고 했던 것도, 이런 시선에서는 터무니없는 욕심이 아니게 된다. 천추태후 본인도 건국자의 혈통으로서 일정 권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자, 여기까지는 인류의 과거와 현재, 일어났던 일에 대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어떨까.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소설 중에 ‘제노제네시스(Xenogenesis)’라는 시리즈가 있다. 총 세 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의 배경은 인류가 한 번 자기 손으로 삶의 터전을 파괴한 이후의 미래인데, 한 줌 남은 지구인들의 구원자이자 압제자로 오안칼리라는 아주 낯선 외계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온몸이 촉수로 뒤덮여 있으며, 세 개의 성별을 가졌고, 다른 종과 유전자를 교환해야만 다음 세대를 만들 수 있다. 이 경우에 그 다른 종은 지구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는 오안칼리 여성과 남성, 제3의 성, 지구인 여성과 남성 총 다섯으로 구성된 결합이 나오며, 이 관계와 그다음 세대의 성장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자기 파괴적인 인류의 대안을 모색한다.
물론 지구상에 이런 식으로 재생산하는 생물은 없고, 이런 가족제도를 가진 인류 집단도 없다. 그러나 작가가 생물학만이 아니라 인류학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이런 상상을 구체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기상천외한 상상력도 진공에서 나오지는 않으며, 대안 모색은 이해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의 시선으로 SF를 읽어본 책 『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는 말하자면, 고려의 가족제도를 인류학의 시선으로 읽기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외계 가족 체계를 상상하는 SF까지 이어지는 여정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아니, 둘 사이를 진동처럼 오간다고 해도 좋겠다. 독해를 위해 들여다본 여덟 개의 소설 중에서 어떤 것은 태생부터 인류학을 바탕에 둔 작품이고, 어떤 작품은 직접 연관은 없으나 인류학과 연결해서 확장해 읽는 재미가 있다. 더해서 SF계의 걸작 세 편을 인류학 민족지 형태로 다시 쓴다고 하는 도전에 이르면, 이것은 확실히 인류학과 SF를 결합한 창작의 영역이다.
SF는 오랫동안 비주류 문학이었고, 인류학은 한국에서 대중이 잘 알지 못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최근 들어서 시대의 소환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과학기술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 생활에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진 혼란의 시대에 대응하고 들여다보기에 적합한 렌즈이기 때문이다. 『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에서 SF와 인류학의 공통점으로 ‘낯설게 보기’와 ‘미래를 향한 상상’을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낯설게 보기’는 사실 문학 전반과 인류학의 접점이기도 하다. 문학 자체가 주위에 있던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보게 만들고, 타자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하며,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초점을 아주 먼 곳으로 옮겨서 여기를 비추거나, 사고실험을 통해 낯선 세계를 여기로 가져올 수 있다는 점만큼은 SF가 여타 문학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두 분야의 공통점으로 다른 이름을 떠올린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유연함이다.
일찍이 옥타비아 버틀러가 말한 바, “제게 SF의 매력은 그저 자유예요. 제가 못할 게 없는 자유요. 제가 다루지 못할 문제가 없죠.”(콘수엘라 프랜시스 엮음, 이수현 옮김,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마음산책, 2023), 334쪽)
인류학 또한 그렇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나오는 통과의례나 「네 인생의 이야기」와 직접 관련된 언어학 가설은 전통적인 인류학의 연구 대상이라면, 「블러드차일드」를 바라보는 의료인류학의 관점이나 『타워』에서 연결되는 도시인류학은 현대 인류학이 얼마나 우리 현실에 가까운 문제까지 다루는지를 보여준다.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을 통해서는 젠더 인류학과 아나키스트 인류학이 생각하는 현재만이 아니라 대안까지 볼 수 있고, 『파견자들』에 이르러서는 인류학이 이제 ‘인류’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고 다종민족지로 가는 과정에서 포스트휴먼이라는 주제와 함께 얽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솔라리스』의 바다에 대해 저자가 말했다시피 “너무나도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고찰과 분석은 과거부터 인류학이 줄곧 집중해온 테마였다.”는 사실이 책 전체를 아우른다.
SF가 다루지 못할 문제가 없다면, 인류학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리고 인류학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할 때, 그 ‘어디든’은 주류 세계만이 아니며 오히려 세상의 온갖 틈새와 구석들을 가리킨다. 내가 인류학을 알고 사랑하는 이유에는 다양한 목소리의 가치를 발견하고, 정상과 옳음에 대해 의문을 표하며, 딜레마를 보는 눈을 길러준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독자들은 지금 내가 말한 장점에서 지금의 SF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SF를 인류학으로 읽거나, 인류학을 SF와 접목시키는 작업이 더 나올수록 양쪽이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래서이기도 하다. 인류학은 소설가의 상상에 구체성을 더해줄 수 있고, SF는 인류학의 상상력을 더 멀리 열어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답이 없어 보이는 지금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
아, 그러나 너무나 의미 있는 대안 모색 같은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좋을 것이다.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 자체는 언제나 재미있으며, 그것 자체가 독서의 즐거움이지 않던가. 문학 독자들에게 인류학을 소개하기 딱 좋은 입문서가 하나 태어났으니, 욕심내자면 심화편도 보고 싶다.
다음 책에서는 좀 더 세부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들도 가능하지 않을까. 두 저자의 연구를 활용한 독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정헌목의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를 최첨단 고층 아파트 디스토피아를 그린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하이라이즈』와 같이 읽어보거나, 황의진의 『빈틈없이 자연스럽게』를 테드 창의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와 읽어본다면, 이전과 또 다른 독서가 되지 않겠는가. 저자가 이미 이번 책에서는 한국 작품을 많이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으니, 그다음도 생각하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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