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은 1943년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아내인 아일린과 누나마저 잃습니다. 그의 곁에 남은 건 이제 아들 리처드뿐이었죠. 하지만 그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리처드를 보살피는 한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글을 씁니다. 또 장미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등 가정적이고 목가적인 일상 역시 꾸준히 이어갔죠.
이 시기 그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합니다. 영국 요리와 고물상의 물건, 민물고기의 이름들을 열거하며 상상 속에서나마 목록이 환기하는 풍요로움을 만끽하죠. 또, 추위와 아픔으로 인해 현실에서 경험하기 힘든 여러 감각들을 상상하고 이를 목록으로 만들며 즐거워합니다.
오웰이 써내려 간 이 목록은 그가 전쟁 통에도 장미를 심었던 일처럼 괴로운 현실을 해결할 수 없고 살아가는 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장미’에 대한 오웰의 글을 읽은 어느 독자가 자연을 여유롭고 한가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일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는 ‘무용한 것들의 목록’을 쓰는 일, 즉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며 평범한 기쁨을 누리는 일이 자신의 삶을, 그리고 이 목록을 읽게 될 독자들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또 현실의 괴로움에 집중하는 일이 곧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라고 믿었던 시대에, 현실과 대비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주된 원천인 자연”(317쪽)에 주목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일이야말로 정치적인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죠.
오웰은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쓴 『1984』, 『동물농장』 등의 대표작을 통해 정치적 글쓰기의 대가로 평가받아 왔는데요. 『오웰의 장미』를 읽고 나면 그가 정치적 행위를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에 분노나 고통보다 더 큰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솔닛의 여정을 통해 오웰이 시련과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지켜내고자 했던 ‘사랑’이야말로 내일의 가능성을 믿고 희망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독자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한국에도 오웰처럼 오랜 세월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미래를 위한 희망의 몸짓을 지속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주 강정마을의 ‘강정지킴이’들입니다. 이들은 ‘강정평화네트워크’를 조직하고 10년 넘게 제주 해군기지 폐쇄를 위한 불복종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인데요. 『돌들의 춤』은 이 중 11명의 강정지킴이를 인터뷰하고 엮은 책으로, 매일 “백배, 미사, 인간띠잇기와 4종 댄스”와 같은 일상적 저항행동을 펼치며 국가 주도의 폭력과 자연 파괴를 막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의 몸짓 역시 누군가에게는 오웰의 목록처럼 ‘무용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돌들의 춤』을 읽으며 우리는 의례처럼 매일 그것을 수행해온 이들의 몸짓이 장미를 심는 일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고, 미래의 가능성을 믿는 행위라는 걸 알게 됩니다. 또 열한 명의 강정지킴이들이 묘사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사랑과 연대의 힘만큼은 같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긴 시간 공동체의 일원으로 저항행동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지켜내는 힘이야말로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몸치에 가깝지만 같은 이유로 강정 4종 댄스를 열심히 춥니다. (……) 몰입하다 보면 마음과 몸이 서로를 용납하고 해방시켜줍니다. 함께 춤추는 다른 사람의 환한 표정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지요.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체험의 순간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치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내몰리고 떠밀려왔던 사람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한층 가난해진 마음을 열어 문득 연결된 서로의 호흡과 진동을 감각하고 함께 리듬을 타는 순간, 거기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갑게 얼어붙은 각자의 마음속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명의 리듬, 연대의 따듯한 온기가 차오르는 순간 말입니다.”(『돌들의 춤』, 2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