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니 종종, 책 만들기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세계에서 책을 만드는 게, 읽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물론 그때마다 저 나름의 설명, 대답, 혹은 합리화를 하곤 합니다. 책은 여전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전달의 매체다, 책은 다른 매체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율적이고 깊은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런데 이런 당위적인 말들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껴질 때도 많지요.
『갈대 속의 영원』은 당위적이고 규범적인 말 한마디 없이 책이 가진 힘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책입니다. 처음 이 책의 원고를 읽게 되었을 때 대단히 감각적이고 거의 신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글쓰기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나요.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로마로부터 출발하는 책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무엇보다 ‘이야기책’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또는 천일야화처럼 무수한 에피소드로 가득 찬 이야기책이요.
오늘은 이 책의 여러 가지 주제와 연관되는, 다소 전통적인(?) 큐레이션을 해보았습니다.―편집자 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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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을 하나의 장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장르의 대표 작가로 꼽힐 저자가 알베르토 망겔입니다. ‘책의 수호자’, ‘세계 최고의 독서가’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망겔은 시력을 잃어가던 보르헤스에게 4년 동안 책을 읽어준 경험, 보르헤스의 뒤를 이어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한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갈대 속의 영원』 역시 알베르토 망겔의 영향 위에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학다식한 저자가 책에 관해, 도서관에 관해 여러 측면과 주제를 넘나들며 풍부하고 흥미롭게 써낸다는 점에서요. (두 저자 모두 스페인어를 쓴다는 점도 재미있는데, 스페인어 문학의 마술적 전통을 떠올려보면 우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독서의 역사』는 망겔의 대표작으로, 독서라는 행위가 어떻게 형성되어왔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형성해왔는지를 다룹니다. 도서관이라는 주제에 관심 있는 분께는, 알베르토 망겔의 『밤의 도서관』도 추천합니다.
“독서 행위 그 자체처럼, 독서의 역사는 우리 당대로―나를 향해서, 그리고 독서가로서의 내 경험을 향해서―돌진해 왔다가 아득히 먼 세기의 첫 페이지로 되돌아간다. 독서의 역사는 장(章)을 뛰어넘기도 하고 대충 훑거나 선별해 읽고 또다시 읽기도 하면서 판에 박힌 순서를 따르길 거부한다.”―『독서의 역사』, 4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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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인 책은 한 권뿐이다. 바로 불을 지르는 조직의 규정이다. 그 텍스트에는 1790년 미국에서 영어로 된 책을 불태우기 위한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최초의 소방관이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적혀 있다. 이 주장을 반박하는 글도 없으며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문서가 제거되고 책이 유통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역사를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다.”―『갈대 속의 영원』, 300쪽
『1984』, 『멋진 신세계』와 더불어 디스토피아적 미래 소설의 고전으로 불리는 책이지요. 『갈대 속의 영원』에서도 이 작품이 다루어집니다. 이레네 바예호는 책을 파괴하려 한 역사상의 무수한 시도들(주로 권력에 의한)과 그에 맞서 책을, 지식을, 사상을 보존하려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러 역사상의 사건들과 함께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이 같이 등장합니다. 제목 『화씨 451』은 책이 불타는 온도입니다.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만드는 독서는 불법으로 규정되는 시대, 주인공의 직업은 책을 불태우는 일입니다. 1953년 발표된 소설인데도 지금 우리가 삶의 속도에 관해, 검열에 관해, 매체와 사유에 관해 고민하는 문제들이 잘 녹아 있는 작품이에요.
“이제 알겠소? 왜 책들이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는지?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삶의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오. 그런데 골치 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달덩이처럼 둥글고 반반하기만 한 밀랍 얼굴을 바라는 거야. 숨구멍도 없고, 잔털도 없고, 표정도 없지. 꽃들이 빗물과 토양의 자양분을 흡수해서 살지 않고 다른 꽃에 기생해서만 살려고 하는 세상,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오.”―『화씨 451』, 13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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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마지막 책은 ‘책에 대한 사랑’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책,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입니다. 패디먼은 작가이자 편집자이자 무엇보다 애서가로서 독서 경험과 연관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중요한 주제들까지 풀어놓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 유래했으며 “몇 달 전 남편과 나는 드디어 책을 한데 섞기로 결정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챕터, 「책의 결혼」은 꼭 누군가와 서재를 합쳐본 적이 있지 않더라도 ‘책 정리’를 둘러싼 골치 아프고 즐거운 문제들을 떠올리게 하고, 「너덜너덜한 겉모습」이라는 글에서는 책의 귀를 접고 메모를 하고 심지어 책장을 찢어 보관하는, 어떤 애서가들이라면 기겁할 행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독서광인 친구와 수다 떠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서재 결혼 시키기』를 즐겁게 읽으셨다면, 앤 패디먼의 데뷔작이자 독서 에세이와는 아주 다른 방식의 르포르타주인 『리아의 나라』도 한번 들여다 봐주시길!)
“나는 또 길게 사슬을 이루며 늘어선 책 소유자들 가운데 하나의 작은 고리를 이루는 느낌도 즐기게 되었다. 이제 나는 희귀본 수집가들이 애장하는 흠 하나 없는 초판―메모도, 서명도, 장서표도 없는 책―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책의 여백을 모두가 함께 와서 먹을 수 있는 문학적 공동 식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움도 커졌다.”―『서재 결혼 시키기』, 20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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