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그렇게 내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나무 얘기를 하던 중에, 나는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조지 오웰의 에세이 얘기를 했다. 그것은 1946년 봄 그가 단숨에 써서 《트리뷴》에 발표한 짧고 서정적인 글이다. 오웰은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약 여든 편의 에세이를 이 사회주의 주간지에 기고했는데, 이 에세이는 4월 26일에 「브레이 본당신부를 위한 한마디(A Good Word for the Vicar of Bray)」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버크셔 교회 묘지에 있는 한 그루 주목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글은 오래전에 그 나무를 심은 것으로 알려진 본당신부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 거기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며 종횡무진하는 대가적인 솜씨를 보여준다. 문제의 신부는 종교전쟁에서 거듭 입장을 바꾼 정치적 변절자로 유명한데,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달아나야 했던 시기에도 그 변절 덕분에 나무처럼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웰은 그 신부에 대해 이렇게 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후, 그에게서 남은 것이라고는 우스꽝스러운 노래와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뿐이다. 이 나무는 대대로 사람들의 눈을 쉬게 해왔으니, 그가 정치적 변절로 초래했을 어떤 악영향도 상쇄하고 남았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또 오웰은 버마의 마지막 왕에게로 비약하여, 그가 저질렀다고 알려진 악행들에 대해 언급한 후, 왕이 만달레이에 심은 나무들 얘기로 넘어간다. “그 타마린드 나무들은 상쾌한 그늘을 드리우다가 1942년 일본의 소이탄에 불타 없어졌다.” 오웰은 버마에서 대영제국의 경찰로 복무했던 전력이 있으니, 아마도 1920년대에 그 나무들을 자기 눈으로 보았을 터이다. 런던 서쪽의 작은 타운 브레이의 교회 묘지에 있는 거대한 주목을 직접 보았듯이 말이다.❀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나무를 심는 것, 특히 오래가는 단단한 나무를 심는 것은 돈도 수고도 별로 들이지 않고 후세에 해줄 수 있는 선물이다. 만일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당신이 선악 간에 행한 다른 어떤 일이 갖는 가시적 효과보다도 훨씬 오래갈 것이다.” 그러고는 10년 전에 자신이 심은 값싼 장미들과 유실수들에 대해, 그리고 얼마 전에 그것들을 다시 찾아 자신이 후세에 남길 조촐한 식물학적 기여를 바라보았던 일에 대해 들려준다. “유실수 한 그루와 장미 한 그루는 죽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잘 자라고 있다. 도합 유실수 다섯 그루에 장미가 일곱 그루, 그리고 구스베리 덤불이 둘인데, 다해서 12 하고도 6펜스❀❀밖에 들지 않았다. 이 식물들에는 별다른 일거리도 따르지 않았고, 애초에 들인 액수 이상의 비용도 전혀 들지 않았다. 심지어 거름도 따로 준 일이 없었다. 그저 이따금 주변 농장의 말들이 울타리 밖에 멈춰 섰다 지나갈 때면 양동이를 들고 나가 주워 담아 온 것이 전부였다.”
이 마지막 줄을 읽으며 나는 양동이를 든 작가와 울타리 너머로 지나가는 말들을 떠올렸지만, 당시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으며 왜 장미를 심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에세이는 처음 읽었을 때부터 기억할 만하고 감동적인 글이라고 여겨졌다. 나는 그것이 오웰의 충분히 계발되지 않은 어떤 면모이리라고, 만일 그가 덜 험난한 시대에 살았더라면 되었음 직한 어떤 사람의 희미한 자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점에서는 내가 틀렸다.
그의 삶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1903년 6월 25일, 즉 보어전쟁 직후에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춘기가 되었으며(열한 살 때 쓴 애국적인 시가 그가 처음 공개 지면에 발표한 글이었다), 러시아혁명과 아일랜드독립전쟁이 1920년대까지, 즉 그의 성년기 초입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1930년대 내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참사의 조짐들이 고조되어가는 것을 지켜본, 그리고 1937년에는 스페인내전에서 싸운 사람 중 하나였다. 독일군의 공습 동안 런던에 살았으며, 살던 집이 폭격당해 길거리에 나앉았고, 1945년에는 ‘냉전(cold war)’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냉전과 핵 병기고가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1950년 1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갈등과 위협이 그의 관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나무 심기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오웰 독본(The Orwell Reader)』이라는 제목의 큼직하고 볼썽사나운 페이퍼백으로 읽었다. 책장 모서리가 수없이 접힌 그 책은 내가 스무 살 무렵 한 중고서점에서 싸게 사서 여러 해를 두고 뒤져가며 샅샅이 읽은 것이었다. 그 책을 통해 나는 그의 에세이스트로서의 문체와 어조를, 다른 작가들이나 정치나 언어나 글쓰기에 대한 견해들을 알게 되었다. 워낙 젊었을 때 탐독한 책이라 나 또한 에세이스트가 되어가는 암중모색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족했다. 1945년에 발표된 우화 『동물농장』은 어린 시절에 만났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충실한 말[馬] 복서의 죽음을 슬퍼했을 뿐 그것이 러시아혁명이 스탈린주의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알레고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1984』는 10대 때 처음 읽었고, 그가 스페인내전을 몸소 겪고 쓴 『카탈루냐 찬가』를 알게 된 것은 20대 때였다. 이 책은 내 두 번째 책인 『야만의 꿈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자기편의 단점들에 대한 정직성과 동시에 충성심을 보여주는 표본이자, 개인적 경험과 의심이나 불편 같은 속내를 정치적 서사로 만들어가는 법을, 다시 말해 크고 역사적인 것 안에서 사소하고 주관적인 내면을 다루는 법을 보여준 본보기였다. 그는 내게 가장 중요한 문학적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였지만, 나는 그에 대해 그 자신이 책에서 보여준 것이나 대체로 짐작되는 것들 이상은 알지 못했다.
내가 샘에게 알려준 그 에세이는 나무들의 사에쿨룸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래를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무엇으로, 그뿐 아니라 최초의 핵폭탄이 투하된 이듬해에도 여전히 어느 정도 신뢰를 걸 만한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었다. “사과나무도 100년은 너끈히 산다. 그러니까 내가 1936년에 심은 콕스 사과나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 참나무나 너도밤나무는 수백 년을 살면서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후에야 마침내 목재로 켜질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조림 사업으로 사회에 대한 모든 의무를 다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뭔가 반사회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일기장에 적어두었다가, 적당한 계절이 오면 땅에 도토리를 하나쯤 묻어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 에세이는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사소한 것에서 중대한 것으로―이 경우에는 한 그루 사과나무에서 과오에 대한 보상과 후세를 위한 유증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그의 작품에서 흔히 나타나는 글쓰기 방식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나무 얘기에 빠져들었던 그 여름날, 내가 샘에게 오웰의 정원 이야기를 해주자 그는 흥분했고, 우리는 그 다섯 그루 과일나무가 아직도 있는지 확인해보러 내 컴퓨터로 달려갔다. 단 몇 분 만에 우리는 1936년 4월에 오웰이 이사한 시골집 주소를 알아냈고, 또 1, 2분 만에 지도 앱으로 그 주소를 찾아내 확대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항공사진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녹색 수풀 덩어리들로 가득해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샘은 우리가 찾아낸 주소지에 살고 있을 미지의 인물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주소는 내가 처음 그 에세이를 읽은 후로 내내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시골이었다. 샘의 편지는 아주 그다웠다. “저희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그는 자신과 나의 웹사이트 링크까지 곁들이며 우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에 흥미를 가지고 역사적인 비화들을 조사하는 데 꽤 괜찮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임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그날 내가 케임브리지보다 몇 정거장 앞인 하트퍼드셔의 발독에서 기차에서 내렸을 때까지도, 답장은 여전히 받지 못한 채였다. 나는 다소 울렁거렸고, 그 시골집 문을 두드릴 생각에 긴장되기도 했지만 무척 들떠 있었다.
그해는 내게 무척 힘든 한 해였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큰 병을 앓았고, 집에서 잘 쉬며 건강을 회복해야 했다. 하지만 여행을 얼마나 할 수 있는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던 끝에 나는 영국과의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작은 글자로 된 그 몇 쪽에 걸친 계약서 어딘가에는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최소 1만 파운드를 물어낼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런던까지 날아가 길거리에서 쓰러지든가 무대 위에서 주저앉을 각오를 하고 정치며 사상에 대해 떠들어야 했다. 그리고 기왕 그렇게 멀리 왔으니, 북부 지방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 내처 맨체스터에, 그리고 내 옛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롭 맥팔레인과 공개 대담을 하러 케임브리지에 가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취소하고 싶었던 이 여행에서 나는 기대하지 않던 것을 만나게 되려는 참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알려주자, 그는 행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오래된 마켓 타운에서 벗어나 하트퍼드셔의 구릉진 들판을 달리는 여행이 좀 더 걸렸으면 싶었다. 막상 도착할 일이 긴장되기도 했고, 휙휙 스쳐 가는 농지들에 매혹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링턴 마을에, 그리고 내가 그 방문에서 보게 될 것에 도착하는 데는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시골길을 달리다 말고, 택시 기사는 밖에 나와 있는 한 남자를 보자 말했다. “아, 저기 그레이엄이 가네요. 금방 소개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