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편집자로 일한다고 소개하면 ‘본인 책은 안 쓰세요?’ 같은 질문을 종종 들어요. 편집자는 대부분 예비 작가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럴 땐 실제로 편집자 출신 작가들이 많은 것과 별개로, 잘 듣고 읽는 것의 쓸모가 쉽게 묻히는 것 같아 아쉬워요. 특히 모두가 자기만의 ‘콘텐츠’를 가진 크리에이터가 되길 권장하는 요즘, 말 잘하는 법에 대한 ‘썰’이 넘쳐나는 데 반해, 듣는 태도와 방법을 논하는 이야기는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올해 반비의 마지막 신간 『타인을 듣는 시간』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반가울 만한 책이에요. 세계 곳곳을 다니며 타인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을 해온 다큐멘터리 피디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이자, 13편의 논픽션(또는 논픽션의 속성을 띤 독특한 작품)에 대한 독서기인 이 책은 무엇보다 경청의 힘과 듣기의 윤리에 관해 다루고 있어요. 나와 연결되어 있는 타인들을 돌아보게 되는 연말, 2021년 마지막 책타래는 타인의 이야기를 더 잘 듣기 위한 태도를 고민해보려 합니다.―편집자 pip “구술을 어떻게 듣고, 기록할 것인가”라는 부제에 대한 답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어요. 들을 만하다고 인정받지 못한 목소리가 “좀 더 잘, 제대로 들릴 수 있도록” 구술기록 작업을 해온 세 저자는 자신들의 활동을 ‘인권기록활동’이라 부르는데요.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 약자, 국가폭력 및 재난참사 피해자 들의 삶을 기록하는 경험에서 길어 올린 앎과 이해를 담아내는 한편, 이 같은 구술기록을 기획하고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방법을 상세히 알려줍니다. 인터뷰부터 구술사, 민족지, 또 심층면접 등의 질적연구까지 타인의 말과 삶을 기록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 청자/기록자가 갖춰야 할 태도뿐 아니라 일정 짜기, 장소의 중요성 등 실질적인 정보도 풍부하게 전하고 있어요. 저자들은 구술자에 대한 존중과, ‘쉬운’ 글을 벗어나기 위한 성찰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구술기록에서 도모해야 하는 것은 소수자·피해생존자의 치유보단 역량 강화, 존엄의 회복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고요. 거주지를 바꾸지 않는 이유를 질문받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가 “자신을 잔혹하게 학대한 곳을 ‘고향’이라고”, “함께 했던 사람들을 ‘가족’으로 말했을 때에야 그 폭력의 실체가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아픈 깨달음을 읽을 때쯤이면, 존중과 이해 같은 말이 더 이상 쉽거나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경청과 존중은 의아함일 수도 있고, 깊은 공명일 수도 있으며, 마음을 헤아려주고 토닥거리는 말로 드러날 수도 있다. 대화에 집중하되 내 모습을 상대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 잘 듣는다는 것은 또한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다른 삶의 맥락을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통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삶의 복잡성을 인식하는 것이다.”―128쪽 오키나와는 근대 이전까지 일본과 다른 별개의 왕국이었고, 일본의 침략 이후에도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온 일본 내에서도 특별한 장소예요.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이런 오키나와를 대상으로 현지 일반인들의 ‘생활사’를 구술청취하는 현장조사를 수행해온 사회학자이고요. 그는 자신의 연구 방법을 “이름도 없는 거리를 걸으며 만난 한 명, 한 명의 성장 과정과 인생 이야기를 곰곰이 듣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한데, 개인의 생활사를 단순히 사회나 역사 분석의 자료로 여기면 그 풍부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반대로 생활사를 사회적·역사적 실재와 떨어뜨려 소설처럼 소비해버리면 그 배후의 사회적·역사적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기죠. 이 책은 이런 딜레마에서 출발해 “이야기와 역사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생활사 조사 방법론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이 책에는 생활사 방법론에 대한 이론적 논의뿐 아니라, 구술청취 현장의 삽화에서 출발하는 통찰과 사유를 에세이처럼 풀어낸 글도 다양해요. 이론을 다룰 때에도 구체적인 구술청취 사례가 넉넉히 다뤄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표제작의 ‘망고’와 ‘수류탄’이 어떤 의미를 지닌 사물인지, 어떻게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나란히 붙게 됐는지, 책을 펼치면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복수의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은 우리들 인생에서는 통상적인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현재의 이야기 안에 혼재하는 복수의 과거 그 모든 것들은 실재한다. 그것은 새롭게 이야기된다고 해서 애매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새롭게 이야기하고 되물으며 서서히 그 의미가 확장된다. 현실은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은 무수히 존재한다. 이와 같이 모두에게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며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 시간을 경험하는 방법이나 말하는 방법은 무한하다. 진동하는 시제(時制)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들은 눈앞에서 생활사를 말하는 구술자 안에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한다.”―122쪽 마지막으로 결이 다른 책을 소개하려 해요. 잘 듣고 읽고 쓴다는 것을 고민할 때, 이제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의 문해력(리터러시)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이 책은 양육서이지만, 디지털 리터러시야말로 아이에게 꼭 가르쳐야 하는 능력이라면 성인 역시 갖추고 있어야 할 역량이라는 점에서 양육을 하지 않는 사람도 읽어볼 만해요. 아이들이 가정, 학교, 사회, 인간관계에서 디지털 미디어로 인해 겪게 되는 문제 상황과 해결 방안을 따라가다 보면, 중요한 것은 질적 차이를 무시한 ‘스크린 타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보호자가 아이에게 질문하는 법, 아이의 고민을 듣는 자세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최근 들어 양육자나 보호자가 아니더라도 어린이·청소년의 동료 시민으로서 그들이 디지털기기를 통해 어떤 유해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사이버폭력을 겪고 있는지 알 필요를 절감하는데요. "어른과 아이 사이에 오해가 발생하기 쉽다는 점을 인지"한 채 문제에 접근하고, 테크놀로지를 "배움의 수단이자 창작의 도구"로 활용할 때 타인을 잘 들을 수 있는 디지털 시민으로, 아이와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지털기기를 정말로 지혜롭게 사용하는 방법은 관계에 관한 것이다. 타인과 서로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즉 신뢰와 조화에 관한 것이다.”―14쪽 2021년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에 덧붙이는 짤막한 한 해 정리 송구영신 근하신년 👑 올해의 책 『인류, 이주, 생존』. 인류, 나아가 생명체는 끊임없이 이주하고 이동하며, 이종과의 접촉을 통해 살아남아왔다는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올해의 논픽션. 이주, 혼종,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을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온 흐름을 유려하게 타파하는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 올해의 성취 『해방자 신데렐라』를 보시면, 앞뒤 표지 종이와 책등 부분을 감싸고 있는 종이가 다르지요. 이런 후가공 방식을 삼중바리(일본어 ‘바리(貼リ)’에서 온 말이라고…)라고 하는데, 반비 내에서 처음 시도된 사양이기도 해요. 시간과 비용이 더 많이 드는 공정인 만큼 책에 어울리는 더 멋진 만듦새가 실현된 듯해 뿌듯해요. 💌 올해의 책타래 아니, 벌써 1년이었다니! 💬 올해의 명대사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과 기술의 정립 과정을 다루는 넷플릭스 시리즈 「마인드헌터」를 다시 정주행했어요. 주인공 FBI 요원 홀든은 여러 사람을 죽인 살인범(연쇄살인범이라는 용어도 없던 시절)을 인터뷰한다는, 당시로선 충격적인 시도가 반대에 부딪히자 동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허락받는 것보다 용서를 구하는 게 쉬워요.(It's easier to ask forgiveness than permission.)" 👾 올해의 안절부절 노라 에프런 책의 개정판을 준비하며, 새로운 제목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와 새 표지가 작가 재단 측의 컨펌을 받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던 한 달...😨 제목에 대한 좋은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려요.. 💞 올해의 구호 “‘나중에’를 끝내자, 차별금지법이 먼저다!” 👻 올해의 짤 |
책과 책을 잇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