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TMI 1 이 책이 출간된 지 몇 개월 안 됐을 때 반비의 신입 편집자가 되었어요. 교정교열도 거의 백지이던 출근 이튿날엔가 선배들이 봤던 교정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까 싶어, 사무실의 수많은 책보다 더한 존재감으로 쌓여 있는 교정지 뭉텅이에서 제일 위의 것을 집었습니다. 여러 수정 사항이 적혀 있는 『멀고도 가까운』 교정지였습니다. 그걸 읽어봐도 글의 어디를 고치고 다듬어야 할지 판단 기준을 가늠하진 못했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한 단어를 ‘감정이입’으로 일괄 돌려놔달라는 요청이었어요. 어떤 상황일까 찾아보니, 원서의 영어 단어 empathy, sympathy, compassion 등의 뜻과 뉘앙스 차이를 파악해서 우리말 맥락에 맞게 감정이입, 공감, 동정(심) 등으로 적절히 옮기는 과제인 것 같았습니다.
감정이입이란 용어는 왜 담당 편집자에게 고민의 여지를 주었을까? 이 책의 주요 개념이 공감이란 역어로 대체됐더라면 어땠을지, 또는 공감과 동정이 쓰인 문맥은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그렇게 감정이입의 기능, 이야기와의 연관성 등을 좀 더 생각해보면서, 이전에는 별 생각 없이 넘겼던 부분이 이제는 만약 교정 과정 중에 교체되지 않았다면 글 자체를 조금은 다르게 만들었을 요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멀고도 가까운』은 더 특별한 책이 되었고, 편집자가 이렇게 세심하고 까다로운 일에도 개입해야 한다니 겁도 났습니다. 이 책에 관한 저의 기억 하나를 책타래 덕에 다시 떠올려봅니다. 『멀고도 가까운』에서 솔닛은 훌륭한 여행자로 보고 만나고 변화하며 살아간다고 일컬을 만합니다. 장소가 품고 있는 깊이를 두 발로 감각하고 성찰하며, 전혀 다른 낯선 곳에서 다른 이야기와 다른 자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이런 면모를 더 폭넓고 섬세하게 펼쳐 보이는 책이 곧 『마음의 발걸음』입니다. 떠남, 길, 모험, 헤맴, 여행은 항상 솔닛의 한 테마였지만, 이 책은 한 나라에 관한, 여행과 여행수필의 경계를 실험하는 본격적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마음의 발걸음이기도 해서, 다른 장소에 가면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이 여행에서 내 마음의 발걸음도 한번 뒤따라 가보고 싶었다.” ―『마음의 발걸음』, 7쪽
여행지 아일랜드는 솔닛의 어머니 쪽 조상들의 나라, 오랫동안 ‘유럽 내의 제3세계’라 불렸고 여전히음유시인들이 있는 나라이지요. 아일랜드에 대해 솔닛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상의 나라로 눈앞에 나타난 남의 나라 아일랜드는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면서 집을 떠날 기회를 주었고, 길을 잃으면서 길을 찾을 기회를 주었다.” 이 책에서도 솔닛은 아일랜드와 유럽, 돌땅과 숲, 미국 서부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막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찾아 나서고, 그 이야기와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처형당한 아일랜드의 퀴어 독립영웅 로저 케이스먼트와 참상 속의 열대 나비, 고문의 세계를 묘사한 공문서와 사랑과 쾌락의 세계를 묘사한 사문서, 항상 같은 길을 떠도는 다리 다친 걸인, 흑사병에 비견될 만한 ‘대기근’ 내내 식량 수출국이었다는 아이러니 등등.
혹시
“마음의 발걸음”을 벌써 검색해보셨나요?(...) 이 책은 아직 제작 중입니다. 다음 주에 여러분을 만나게 될 이 책에 대해, 입이 간질간질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까요. “여행하기 위한 읽기의 정석”이자 ‘집’에서 여행하기를 위한 책이란 평도 받은 만큼, 이 가을에 잘 맞는 책일 거라 기대합니다.
“하나의 장소는 한편으로는 고정되어 있는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힘들이 모이는 곳이다. 예컨대 아일랜드 국립자연사박물관에서 열대의 나비 앞에 있다 보면, 어느새 그 나비가 날던 페루의 푸투마요 정글에 들어서게 되고 그 나비를 잡은 퀴어 독립영웅 로저 케이스먼트와 마주치게 된다. 나를 어딘가로 이끄는 것들이 뭐든지 간에, 그곳에 가면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또 다른 곳들(다른 장소, 다른 시간)로 이끈다.” ―『마음의 발걸음』, 11쪽 『멀고도 가까운』을 처음 읽고서, 솔닛과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을 검색하다가 마리아 포포바의 웹사이트 브레인피킹스(brainpickings.org)를 알게 됐는데요. 글이 좋고 사이트도 예쁘고 무엇보다 셸리와 솔닛에 대한 게시물이 많아서, 취향이 맞는 필자를 찾았나 보다 설레발놓았더랍니다. 이것이 착각이었던 건 포포바는 2006년부터 문학과 예술, 인문, 과학 등을 넘나들며 수많은 것을 써왔으니, 사실 셸리와 솔닛에 대한 글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포포바는 자신을
‘읽는 사람(독서가, a reader)’이자 ‘쓰는 사람(작가, a writer)’이라고 소개합니다.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첫 키워드로 읽는 사람을 들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공감대를 만들어줬고요. 그렇게 포포바의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웹사이트를 종종 찾던 중 한 라이츠 가이드(출판사 및 에이전시의 수출용 홍보 자료)에서 포포바의 첫 단독 저서가 2020년 초 미국에서 출간 예정임을 보았습니다. 책의 만만찮은 볼륨이나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저자의 매우 독특한 콘셉트라는 점 등이 부담일 수 있다는 검토 결과에 더 추진하지는 못했고요. 도서출판 다른에서 올 2월 『진리의 발견(Figuri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설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대개 여성이고, 대개 퀴어인 인물(figure)들로 새로운 지성사를 써냅니다. 첫 챕터에선 백인 남성 천문학자의 대표급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케플러를 다루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가 쓴 SF소설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과정을 자세히 다루죠. 이후로 미국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 세계 최초의 프로그레머 러브레이스, 마거릿 풀러, 에밀리 디킨슨, 레이철 카슨 등등을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한 인물로 이야기합니다. “앞서나간 자들”로 400여 년의 시간을 자기만의 관점과 언어로 써내려간 이 840쪽짜리 작업에서, 포포바의 방대한 독서 이력이 유려하게 빛나는 듯합니다.
“수평과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삶은 비선형적인 방식으로만 파악되며 ‘전기biography’라는 직선의 그래프가 아닌 여러 측면과 여러 빛을 그린 그림으로 나타난다. 삶이란 다른 삶과 얽힐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의 직물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만 인생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을 구할 수 있다.” ―『진리의 발견』, 15쪽 💌멀고도 가까운 TMI 2 책에도 언급된, 솔닛의 친구이자 미술 작가인 앤 체임벌린의 작업 두 가지를 소개해봅니다. 시온암센터 벽면에 설치된
‘스토리 타일(Story Tiles)’. “그녀는 100피트는 족히 되는 병원 로비의 벽 전체에 부드러운 색감의 커다란 타일을 붙였다. 타일 하나하나마다 식물 문양을 넣고 식물의 이름도 새겨 넣었다. 그러자 암환자와 완치된 환자, 병원 도우미 들이 그 위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앤도 다른 데서 보았던 시나 좋은 문장들을 옮겨 적었다. …… 식물도감이자, 동시에 고백들, 건물 위층의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운명을 맞이하러 가는 길에 속으로 되뇌는 말들을 적어 놓은 책이었다.” ―『멀고도 가까운』, 188~189쪽![]() ![]() 앤 체임벌린의 유작. 솔닛은 책 곳곳에서 “하얀 벽 위에 석고로 만들어 붙인 섬들을 빨간 실로 이어 놓았던 그 작품”을 떠올립니다. “앤은 마침내 마지막 걸작, 즉 커다란 벽에 석고로 만든 섬들을 이어서 만든 양각의 지형도를 제작했다. 가늘고 빨간 실로 각각의 섬들을 이은 …… 그 작품이 모든 것은 이어져 있음을 우아하게 주장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멀고도 가까운』, 192쪽 최현숙 작가는 노인들처럼 스스로 말하고 써낼 자리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 편견과 소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생각, 역사를 듣고 기록하는 ‘구술생애사’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런 작업들은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라는 『멀고도 가까운』의 한 구절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작별 일기』는 이런 최현숙 작가가 치매에 걸린 자신의 노모 곁에 천 일간 함께한 기록입니다. 이 책은 엄마와 딸에 관한 내밀한 기록일 뿐 아니라, 엄마라는 한 여성이 늙고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을 그 여성의 경험과 젠더·계급·문화적 위치 속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합니다. 실버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돌봄 노동자들에 관한 성찰로도 수시로 이어지고요. “해체”되어가는 엄마에 관한 이만큼 냉철하고 성실한 기록이자 아프고 슬픈 기록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엄마는 ‘독한 불행’ 속에 있었다. 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 사회적 평균을 갖다 대는 것은, 적어도 당사자에게는 폭력이다. 그녀의 딸은 내내 평균을 들이대며 내심 사회적 저울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엄마는 그 ‘독한 불행’에서조차 미끄러져 나왔다. 평화나 행복이 아닌 무력과 무능의 단계로 밀려들어 갔다. …… 나는 그녀의 아직 남은 기능들과 만나 함께해 보려고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녀도 내 손길의 의미를 아는 듯 따뜻하다느니, 부드럽다느니, 차다느니, 아직 답을 해주고 있다. 독한 관찰자를 자처했지만, 계획에 없는 눈물이 때로 응시를 가린다.” ―『작별 일기』 2018년 9월 9일 일기 중에서, 310쪽 『White Mountain』은 여러 책의 표지 일러스트로도 잘 알려진 엄유정 미술 작가가 2013년 봄에,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아이슬란드 북부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40일간 머물며 진행한 페인팅 작업을 모은 책입니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절판 상태라 작가의 또 다른 아이슬란드 드로잉 작업을 살펴볼 수 있는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도 함께 소개합니다.
솔닛은 마찬가지로 작은 어촌 마을인 스티키스홀뮈르의 ‘물 도서관’ 해외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아이슬란드 서해안에 머물렀습니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데 익숙지 않은 작고 외진 마을에서 경험한 존재감 없음의 평온, 평화로운 낯섦에 대해 『멀고도 가까운』에 써놨는데요. 엄유정 작가의 책에서도 그가 경험한 아이슬란드의 “서른여섯 개의 하얀 산”, 빙하와 항구, 사람들에 대한 맑고 차가운 이미지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직접 먼 곳으로 가기 어려운 때에 다른 곳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화집입니다. 작가 홈페이지에서도 일부를 볼 수 있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TMI 3 리베카 솔닛의 「먼 곳의 푸름」 낭독 링크 ‘물 도서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완성된 글이 바로
『길 잃기 안내서』의 2장 「먼 곳의 푸름」입니다.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가면, 솔닛이 자신의 글을 낭독한 녹음 파일을 들을 수 있는데요, 영어 리스닝은 괴롭지만, 그저 솔닛의 목소리로 반복되는 ‘블루’, ‘블루’, ‘딥 블루’를 듣는 것이 그저 근사합니다.(네, 솔닛은 낭독까지 멋집니다!) 이번 책타래 어떻게 보셨나요? |
책과 책을 잇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