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도중에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모딜리아니(1884~1920)의 작품 「수틴의 초상」과 만났다. 러시아의 유대인 마을에서 무일푼으로 파리로 건너온 수틴. 그 거칠고 불온하지만 섬세했던 인물의 초상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수틴의 초상」은 그 후로 내 인생을 통틀어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고 나중에 졸저의 표지에도 사용했다.
당시 디트로이트 미술관은 황폐한 곳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주변이 마치 슬럼가 같았다. 현지에 살던 친구에게 그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거긴 치안이 좋지 않아서…….”라고 말하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바로 그 디트로이트 미술관 중앙 뜰 로비를 장식하고 있던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장대한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도 잊기 힘들다.
1990년에는 출소한 형 서승을 안내하기 위해 미국을 찾았다. 석방 지원 운동에 힘써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면서 대학 부속 포그 미술관에서 반 고흐(1853~1890)의 「머리를 민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 나치가 퇴폐예술로 낙인찍어 루체른에서 경매에 붙였던 탓에 파괴를 면해 이 대학에 소장된 것이다. 나에게 이 초상은 마치 긴 복역을 끝내고 막 출소한 사람처럼 보였다.
미국에는 친구나 지인도 있고, 좋은 미술관도 있으며 훌륭한 오페라나 콘서트 공연도 많다. 그런데도 그 이후 30년 정도 미국에는 그다지 발길을 두지 않았다. 트럼프(이 여행 당시는 아직 대통령 후보자였다.)와 같은 존재, 단적으로 말해 반지성적이고 오만한 자기중심주의가 대두하면 할수록 미국을 향한 나의 기피감도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2016년이 되자, 오랜만에 뉴욕에 가볼 기회가 생겼다. 코스타리카 대학 교수로서 신뢰하던 친구 C 교수가 초청 강연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C 교수는 한국인 여성이지만 수년 전에 과감히 한국에서 코스타리카 대학으로 떠났다. 거기서 살아보며 한국에서 매일 느꼈던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좋지 않았던 몸 상태가 금세 회복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C 교수가 권유한다면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니 코스타리카는 너무 멀었다. 일본에서 출발하는 직항편은 없고, 텍사스주 댈러스나 뉴욕을 경유하는 환승편을 이용해야만 했다. 고민 끝에, 어차피 간다면 이참에 오고 갈 때 뉴욕에 들러 시간을 내서 예전에 방문했던 장소를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내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미국을 여행할 기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먼 옛날 기억의 단편도 되살아났다. 좋은 기억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라는 인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그런 절실한 기억이다. 그 기억들은 내 속에 있는 ‘선한 미국’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시작한다. 출발하면서부터 아끼던 모자를 잃어버리긴 했지만.